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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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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역사/문화 자료] 원(元)의 일본침공
이태엽 at 2016-07-07 08:46
URL http://kallery.net/s.php?i=590

1591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657)
왜사(倭使) 평조신·현소 등이 서울에 왔다. 상(선조)이 비변사의 의논에 따라 황윤길·김성일 등으로 하여금 사적으로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 위로하면서 왜국의 사정을 조용히 묻고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자 현소가 성일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とよとみ ひでよし)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성일 등이 대의로 헤아려 볼 때 옳지 못한 일이라고 타이르자, 현소가 다시 말하기를,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점점 패려하여 성일이 다시 캐묻지 못하였다.


이때 김성일이 유연한 외교를 펼쳤다면 임진왜란을 피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다'는 부분은, 일본이 피장파장의 논리로 자주 이용하는 것인데, 역사적 사실인 것은 맞다.


Mou-Sien Tseng


1272 고려사(高麗史 1451)
‘우리 부자가 뒤이어 입조해 폐하의 각별한 은총을 받음으로써 저희나라 백성들이 잔명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사의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매년 입조해 뵈올 때마다 매양 폐하의 은덕을 입으니 충심으로 보답할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저 일본만은 성스러운 덕화를 입지 못했으니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세를 과시해야 할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함과 군량의 확보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기신다면 심력을 다해 미력이나마 상국의 군대를 도우고 싶습니다.’

이것은 왕고의 세자 왕심(훗날 충렬왕)이 원(元)에 머무르고 있을 때 쓴 편지다. 그는 이 편지를 쓰고 귀국을 허락받았다. 고려사는 왕심이 귀국하고 싶어서 저런 편지를 썼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원(元)은 계속해서 일본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있었고 일본은 계속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元)이 일본침공을 결심하는 데는 그런 국제관계가 영향을 준 것이지 저 편지가 영향을 준 것으로는 볼 수 없다.
1274년 3월 마침내 일본침공이 결정되고 왕고에게도 많은 할당량이 떨어졌다. 삼별초 토벌을 끝낸지 1년도 안된 왕고로서는 부담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충렬왕이 원(元)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1274-04 고려사(高麗史 1451)
“저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번 탐라정벌에 동원되었던 병졸과 뱃사공들이 이제 다시 배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으며, 이번 일본원정에 나설 병졸과 초공들도 전번 부역에 나왔던 일꾼들 가운데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홍다구는 김방경에게 공문을 보내, 배 3백 척과 초공·선원 1만 5천 명을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수가 너무 많으니 어찌 저희나라의 사람만으로 숫자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원래 우리가 관할하던 제주·동녕부·북계의 여러 성의 사람과 서해도에서 요역을 피해 동녕부로 도피해 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물에 익숙하고 또 배를 잘 부리니, 그들을 모두 데려다가 보충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쨋든 일본침공은 강행되었고 공교롭게도 왕고군은 그 선봉에 섰다.

1274-07 고려사(高麗史 1451)
김방경이 일본 정벌군의 선봉별초(先鋒別抄)를 거느리고 먼저 원정길에 올랐다.

1274-10 고려사(高麗史 1451)
도독사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을 지휘하게 하고 박지량과 김흔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김신을 좌군사로 위득유를 지병마사로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했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로 반부를 부사로 임명해 삼익군이라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도원수 흔두와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과 함께 몽고·한족 연합군 2만 5천, 아군 8천, 초공·바닷길 안내자·선원 6천 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천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삼대같이 즐비했다. 날이 저물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들이닥친 폭풍우로 전함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 많이 침몰했으며 김신은 익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김방경, 흔두 그리고 홍다구는 모두 삼별초 토벌을 이끌었던 장수들이다. 일기도는 울릉도만한 섬인데 저 기록을 보아 많은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왕고군이 선봉에 섰으니 왕고가 일본의 원망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Katsushika Hokusai


1280년에는 일본에 대한 재침공이 결정되었다. 이때 충렬왕은 원(元) 황제를 찾아가 왕고의 참전 조건을 개선하였다.

1280-08 고려사(高麗史 1451)
왕이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호종한 신하들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왕이 박의를 시켜, “일본 정벌의 일은 제가 입조해 직접 지시를 받겠습니다.”라고 건의해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흔두·홍다구·범문호가 모두 먼저 명령을 받은지라 ... 이에 왕은 전제조건으로 일곱 개 항목을 들어 수락해 줄 것을 요구했다.

1. 현재 탐라를 수비하고 있는 아군을 일본 정벌군에 보충할 것.
2. 고려군과 한족군의 병력을 줄이는 대신 도리첩목아를 시켜 몽고군을 더 징발하여 출정시킬 것.
3. 홍다구의 직임을 더 높이지 말고 전공을 세운 이후에 포상할 것과 도리첩목아와 고려국왕에게 동정성사의 지휘를 맡길 것.
4. 고려의 군관들에게 모두 패면을 내려줄 것.
5. 중국 연해지역민들을 뱃사공과 선원으로 충당할 것.
6. 안찰사를 파견해 백성들의 애로 사항을 파악할 것.
7. 고려국왕이 친히 합포현으로 가서 군마를 검열한 다음 파병할 것.

이에 황제는, “건의한 사항들을 모두 받아들이노라.”고 허락했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왕고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는 왕고가 전면에 나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1281년 마침내 재침공이 이루어졌으나 이번에도 참패하였다.

1281-04 고려사(高麗史 1451)
흔두·홍다구·김방경·박구·김주정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1281-06 고려사(高麗史 1451)
범문호도 전함 3,500척으로 만군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했다.

1281-07 고려사(高麗史 1451)
원수 김방경이 중랑장 박온을 시켜, “각 부대가 태재부(太宰府)까지 진군해 여러 차례 교전하다가 아군과 적군이 다 퇴각해 있던 차에 만선 50척이 뒤미처 도착하므로 다시 성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라는 보고를 올리고는 노획한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 안장 딸린 말 등의 물품을 바쳤다.

1281-08 고려사(高麗史 1451)
별장 김홍주가 합포현으로부터 행궁에 와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이 패배한 사실과 원수들이 합포현으로 귀환한 것을 보고했다. 흔두·홍다구·범문호 등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가운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흔두, 홍다구 그리고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과 일본에 대한 1차침공을 모두 이끌었던 장수들이고 범문호는 원(元)에 투항한 송(南宋)의 장수다.


蒙古襲来絵詞

일본침공은 왕고에게 득될 것이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복종을 받아내더라도 그 열매는 원(元) 왕조에게만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느라 왕과 백성들 모두 고통스럽기만 했다.
충렬왕이 처한 심정은 아래 기록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1297 고려사절요
황제(성종)가 성남(城南)에 행차하여 사냥하는 것을 관람하였는데, 왕이 호종하여 아뢰기를, “신의 선신(先臣, 원종) 식(禃)이 기미년에 세자로서 조회하러 들어왔을 때에 세조(쿠빌라이 칸) 황제께서 남방을 정벌하고 돌아오셨는데, 선신이 변량(汴梁 북송의 도읍지)의 옛 도읍터에서 맞이하여 뵈니, 세조께서 기뻐하여 칭찬하시고 사랑하심이 날로 더 많아졌으며, 소신(小臣)에 이르러 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시고 대대로 동쪽의 제후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라건대, 기미년(1259년, 원종이 몽골에 들어간 해) 이후의 포로된 자와 유민으로서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에 있는 자를 모두 본국으로 데려가게 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왕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첨부파일
    D. Tsolmon Contemporary Fine Artist.png [내려받기] [보기]

[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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