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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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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신라민족론] (3)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III)
이태엽 at 2016-07-03 02:48
URL http://kallery.net/s.php?i=371

중국의 기록에 왜(倭)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82년에 편찬된 한서부터고 조공의 기록은 5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057 후한서(後漢書 445)
왜(倭)의 노국(奴國)이 공물을 바치고 조알하였다. 사신은 대부를 칭했는데, 왜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다. 광무제는 인수를 하사하였다.

082 한서(漢書)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치소를 두었는데 모두 조선, 예맥, 구려 등의 오랑캐들이다. 상나라가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 그 사람들에게 예의, 밭농사, 양잠 그리고 길쌈을 가르쳤다. 낙랑조선 사람들이 금지된 여덟 가지 조항을 어기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해야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데, 죄를 면하려면 50만을 내야 했다. 비록 면죄받아 평민이 되더라도 세속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배필로 삼지 않았다. 이로써 그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아 문을 닫아거는 일이 없어지고 부녀자들은 정조를 지켜 간음하지 않았다. 그 농민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나 나무로 만든 굽다리 접시를 사용하는데, 도읍에서는 관리와 상인을 따라 종종 그릇을 사용하기도 한다. 군(郡)은 처음에 요동에서 관리를 데려왔는데, 사람들이 문을 닫아걸지 않는 걸 보고 관리와 상인으로 간 자들이 밤이면 도둑질을 하였으니, 풍속이 점점 더 야박해졌다. 이제는 금지된 것을 어기는 자가 점점 많아져 60여 조에 이르게 되었다. 귀하구나, 성현의 가르침이! 동이족은 천성이 유순하여 세 방향의 다른 오랑캐들과 다르다. 그래서 공자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낙랑의 바다 가운데에는 왜인이 사는데, 100여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고 해마다 와서 공물을 바친다.

107 후한서(後漢書 445)
왜(倭)의 국왕 수승(帥升) 등이 생구 160명을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원하였다.

178-184 삼국지(三國志 289)
왜국도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으나 70-80년이 지난 후 난리가 나서 여러 해 동안 서로 싸웠다. 마침내 한 여자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라고 한다. 귀신을 부려서 능히 무리를 미혹하며, 나이가 이미 많은데도 지아비가 없고, 남동생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왕이 된 이래 본 사람이 적었다.

220-265 위략(魏略)
왜(倭)는 대방군 동남 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이 많은 섬에 의거하여 나라를 이루고 산다. 바다 건너 천리에 또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倭)의 종족이다.

289 삼국지(三國志)
왜인은 대방군 동남 쪽 큰 바다 가운데에 사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전에는 100여개 나라였는데, 한(漢) 조정에 알현하는 나라가 있었고, 지금은 사신이 왕래하는 곳이 30개 나라다. 
남쪽으로 가면 야마일국(邪馬壹國)에 이르는데, 여왕이 도읍한 곳으로 바닷길로 10일 동안 가고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관리로는 이지마가 있고, 그 다음은 미마승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미마획지라 부르고, 그 다음은 노가제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여왕국의 동쪽으로 바다 1천여 리를 건너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倭)의 종족이다.
(대마국에서 야마일국까지 8국 15만호가 있고 사마국에서 노국까지 21국이 있는데 여기에 야마일국에 소속되지 않은 구노국까지 합하면 모두 30국이다. 야마일국은 야마대국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445 후한서(後漢書)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100여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漢)과 사신의 왕래가 통하는 곳이 30여개 된다. 나라의 수장은 모두 왕을 칭하는데 대대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있다.

한서(82)의 기록을 보면 조선, 예맥, 구려 그리고 왜(倭)까지 거론되지만 한(韓)은 전혀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한(韓)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289)에 가서야 나타난다. 삼국지는 마한을 54국 10만호라 하고 변진을 24국 4-5만호라고 하였는데, 왜(倭)는 30국의 하나인 야마대국만 7만호라고 하고 있어 규모를 비교할 수 있다. 
190년 요동태수 공손탁은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을 칭하며 한(漢)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 공손강에 이르러서는 낙랑군에서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던 한(漢)의 유민을 모으고 한(韓)과 예(濊)를 침공하여 대방에 복속시켰다. 220년에 한(漢)을 교체한 위(曹魏)는 238년에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을 토벌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사서에서 왜(倭)에 대한 기록이 풍부해지기 시작한다.

삼국지(三國志 289)
239-06 왜(倭)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대방)군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경도까지 호송하게 했다.
239-12 조서를 내려 왜(倭)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 자수를 내리고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240 (대방)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金), 비단, 융단, 칼(刀), 경(鏡),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243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 액사구 등 8명을 보내 노비, 왜금, 강청겸, 면의, 면포, 단목, 견부, 단궁시를 헌상했다. 액사구 등을 모두 솔선중랑장으로 임명하고 인수를 주었다.
245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을 하사했는데 (대방)군으로 보내 수여토록 했다.
247 왜(倭)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248이전 비미호가 마침내 죽자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의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아서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일여를 세웠다. 일여는 왜의 대부인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인으로 하여금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남녀 생구 30인을 헌상하고 백주 5천개, 공청대구주 2매 그리고 이문잡금 20필을 공물로 바쳤다.


백제와 신라는 이 시기 중국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진서(648)에 280년부터 287년까지 마한왕과 진한왕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위(曹魏)는 265년에 진(西晋)으로 교체되는데 이 진(西晋)은 316년에 망하고 그 잔여 세력이 이듬해에 남쪽에서 다시 진(東晉)을 세웠다. 이 진(東晉)은 다시 송(劉宋), 제(蕭齊), 양(梁), 진(陳)의 순서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한족(漢族)이 이어간 남부의 왕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부의 여러 왕조가 대립하였는데, 589년에 북조의 수(隋)에 의해 통일되었다.
왜(倭)에 대한 기록은 비미호 사후 뜸하다 송(劉宋)때부터 다시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왜(倭)는 삼한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주장한다.

송서(宋書 488)
421년에 조서를 내렸다. "왜의 찬(讚)이 만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성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벼슬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438년에 찬(讚)의 아우 진(珍)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진(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443년에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451년에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군(軍)과 군(君)을 제수하였다.
462년에 제(濟)의 세자 흥(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조하여 "왜왕의 세자 흥(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478년에 흥(興)의 아우 무(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아뢰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고 하고 변방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지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은 덕으로서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를 가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479 남제서(南齊書 537)
479년에 왜(倭) 임금에게 새로 벼슬을 내려주어 사지절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왜(倭) 임금 무(武)는 호칭을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

502 양서(梁書 636)
진(東晉) 안제(397-419)때 왜왕 찬(贊)이 있었다. 찬(贊)이 죽자 동생 미(彌)를 왕으로 세웠다. 미(彌)가 죽자 아들 제(濟)를 왕으로 세웠다. 제(濟)가 죽자 아들 흥(興)을 왕으로 세웠다. 흥(興)이 죽자 동생 무(武)를 왕으로 세웠다. 제(南齊) 건원(479-482)때 무(武)에게 지절독 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진동대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고조(502-549)가 즉위하자 무(武)를 정동장군 직함으로 올려 주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왜왕의 왕위계승은 찬(讚,贊)-진(珍,彌)-제(濟)-흥(興)-무(武)로 이어졌는데 찬(讚)-진(珍)과 흥(興)-무(武)는 형제관계이고 나머지는 부자관계다.
왜는 438년에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劉宋)은 451년에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왜는 다시 478년에 송(劉宋)이 인정한 것에 백제를 넣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劉宋)은 역시 백제를 뺀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제(南齊)는 이것을 그대로 이어 479년에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을 인정한다.
이렇게 백제만 제외된 이유는 왜(倭)가 요청한 나라 중에서 백제만 유일하게 남조와 외교관계를 터놓은 사실과 관련이 있다.
백제는 이미 372년에 송(劉宋)의 전신인 진(東晉)에 조공을 했다고 진서(648)에 나와 있으며 429년부터는 송(劉宋)에도 조공을 한 것으로 송서(488)에 나와 있다. 반면 신라는 제번공직도(526-539)에 ‘신라는 스스로 사신을 보낼 수 없어 521년 백제 사신을 따라와 처음으로 조공하였으며 말도 백제인이 말한 다음에 통했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조가 왜왕에게 작위를 내릴 당시에는 남조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왜왕이 남조로부터 받은 벼슬이 외교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주어진 것일 뿐, 반드시 실질적인 지배관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다만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삼한 국가들에 비해 외교력은 왜(倭)가 우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서기(720)가 편찬되기 수 백 년 전부터 이미 왜(倭)는 삼한 국가들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주장했었다는 사실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북조계통의 사서는 왜(倭)와 한반도와의 관계에 대해 간단한 기록만 전한다.

수서(隋書 636)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敬仰之,恆通使往來。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倭)를 대국으로 여기며 진귀한 물건이 많아서 공경하고 우러러보며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한다.

북사(659)에도 똑같은 내용이 있는데 이는 수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거나 동일한 출처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남북조 사서의 왜(倭)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왜(倭)가 당시 한반도 국가들보다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는 정황을 부정하기 힘들다.
왜(倭)는 훗날 중국에 대해서도 뻣뻣한 자세를 취했다.

수서(隋書 636)
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至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
607년 왜왕 다리사북호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아뢰길 "듣자오니 바다 서쪽 보살천자께서 불법을 다시 일으키신다 하니 사신을 보내 조배드립니다. 아울러 중 수십 명이 여기 와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 국서에는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일 없으신가?' 어쩌고 저쩌고 하였다. 황제가 글을 보고 언짢아 홍려경에게 "오랑캐가 보낸 글이 무례하구나. 다시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같은 축척으로 비교해 본 황남대총과 대선릉의 위성사진.
황남대총은 신라에서 가장 큰 고분이고 대선릉은 일본에서 가장 큰 전방후원분이다.

모한(慕韓)

289 三國志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今有名之爲秦韓
438 宋書 百濟新羅任那 秦韓慕韓
451 宋書 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478 宋書 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479 南齊書 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502 梁書 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

남한강 상류에서 출토된 중원고려비에는 449년에 인근 지역에서 고려와 신라가 국경을 접한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470년에 신라가 금강 유역에 삼년산성을 쌓았다고 나온다.
따라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한은 일찌기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늦어도 478년의 기록에 나오는 진한이 형식상 끼워넣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진한은 삼국지에서 辰韓 또는 秦韓으로 표기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한도 馬韓 이외의 다른 표기가 있지 않았을까?
남조의 사서에 나오는 慕韓(모한)은 삼국지의 마한에 대응된다.
이 마한은 내부에서 성장한 백제에 통합되었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적 양상은 6세기 중엽까지 백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 지역에는 마한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남조의 사서에서 慕韓으로 표기된 것이 아닐까?
이 모한은 일본서기의 4읍에 대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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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 09-1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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