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munications∨
 | 
Infos on Art∨
 
Kallery > _others > 
이태엽
 (trustle)
소개 | 작품 | 자료실 | 방명록
403
[역사/문화 자료] 미중교체기 (3) - 원(元)과 명(明) 사이에서
이태엽 at 2014-02-15 15:06 /
URL http://kallery.net/s.php?i=500

이성계의 가계는 원래 동북지역에서 원(元)의 벼슬을 잇고 있었다. 

1255 조선왕조실록
원(元)에서 알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이안사에게)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1300 조선왕조실록
(이행리에게) 칙명으로 승사랑을 제수하여,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을 다스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일을 맡게 하였다.

1343 조선왕조실록
이자춘은 교주와 함께 박씨를 따라 개원로에 나아가서 진소하니, 본로에서 사유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었다. 1343년 정월에 원(元)에서, 조씨는 적실이 아니고, 교주는 유약하다고 하여, 이자춘으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이내 사자를 보내어 나해를 목 베게 하였다.

이자춘은 이성계의 아버지이고 이안사와 이행리는 모두 그의 조상이다.



한편, 원(元)은 1351년에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봉기가 잇따르자 점차 쇠약해졌다. 이때 왕고는 원(元)에 소속되었던 쌍성총관부를 회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왕고에 입조한 이자춘의 도움이 있었다.

1356-03 고려사(高麗史 1451)
이자춘이 입조하자 왕이 영접하는 자리에서,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고생이 많노라고 위로했다.

1356-07 조선왕조실록
이자춘에게 시소 부윤을 제수하고, 자금어대를 내리고 중현 대부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 정신계를 보내어 교지를 전하여 내응하게 하였다. 이자춘은 명령을 듣고 즉시 함매하고 행군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과 도경 등은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마침내 원(元)은 명(明)에 의해 북방으로 쫓겨나고 중국대륙은 명(明)의 차지가 된다. 
왕고는 이런 변화에 대응하였다.

1368-09 고려사(高麗史 1451)
우리나라 사람 김지수가 원(元)으로부터 돌아와서, “명(明) 수군 함선 1만여 척이 통주에 닻을 내리고 원(元) 수도를 공격하니 황제와 황후는 상도로 도망가고 황태자도 싸우다가 패하자 역시 상도로 도망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백관들에게 명(明)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을 방법을 의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69-04 고려사(高麗史 1451)
명(明) 황제가 부보랑 설사를 보내 ... 황제의 친서는 다음과 같았다. "대명황제가 고려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송(趙宋)이 정치를 그르쳐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되자 우리 한족(漢族)이 아닌 원(元)이 천명을 받아 백 년 넘게 중국의 주인 노릇을 해 왔다. ... 하늘이 이미 그 국왕의 덕을 살펴 왕으로 삼았으니 우린들 어찌 길이 그를 고려의 국왕으로 삼지 않겠는가?"

그런데 옛 쌍성총관부 지역을 두고 명(明)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1388-02 고려사(高麗史 1451)
설장수가 명(明)으로부터 귀국해 황제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철령 이북지역은 애당초 원(元)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1388-02 고려사(高麗史 1451)
명(明)에서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중지를 요청하게 했다. “이미 조상대로부터 영토가 획정되어 있는 바, 따져보면 철령 이북의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는 지역은 계속해서 본국의 영토에 속해 왔습니다. ...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저희를 감싸주시고 도타운 덕으로 어루만져주시어 앞에 든 몇 주의 땅을 저희 나라 영토로 인정해 주십시오.”

1388-03 고려사(高麗史 1451)
명(明)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해 왔다.

여기에 반발한 왕고는 요동침공을 시도하지만 도리어 이성계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무산되고 왕은 권력을 잃었다.

1388-04 고려사(高麗史 1451)
당초 우왕이 최영과 둘이서만 의논해 요동 공격을 결정지어놓고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과인이 요양을 공격하려고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야 할 것이오.”라고 당부했다. ...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1388-05 고려사(高麗史 1451)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1388-06 고려사(高麗史 1451)
원수들이 부대를 동원해 대궐을 지키면서 우왕더러 강화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대궐을 나와 채찍을 잡고 안장에 올라, “오늘은 벌써 날이 저물었다.” 고 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계는 왕씨왕조를 폐하고 이씨왕조를 열었다.

1392-07 조선왕조실록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이 드디어 문하 평리 정희계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의 시좌궁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1392-09 명사(明史 1739)
고려의 지밀직사사 조반 등이 그 나라 도평의사의 주문을 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신 등이 나라의 기로들과 상의하여 그(이성계)에게 국사를 맡아 주도록 다같이 추대했사오니, 오로지 성주의 윤허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유시케 하기를, “과연 천도에 순응하고 인심에 화합할 수 있으며, 변경을 침범하지 않고 사신이 왕래할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그대 나라의 복이니 내가 또 무엇을 책망하겠소.”

1392-11 조선왕조실록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1392-11 명사(明史 1739)
성계가 황태자의 훙거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국호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황제는 이에 그 나라의 옛 칭호에 따라서 조선이라 부르게 했다.

참고:


[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지만원, 자작나무 1996년...
 
 이태엽 12-13 15:42 
사형제도 자체에 대해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존치할 ...
 
Introduction | facebook | Google+ |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