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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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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7)-3 일본천황가 한반도유래설
이태엽 at 2014-01-09 11:35 /
URL http://kallery.net/s.php?i=380



일본 천황가의 한반도 유래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왕조의 출발이 한반도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왕조의 어느 시기에 혈통이 한반도 이주민으로 교체되었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다시 이주민의 유래에 따라 신라, 임나, 부여, 백제 등으로 나뉘어진다.
1890년 성야항(星野恒 ほしの ひさし)은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연구한 후 일본 천황가의 선조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라왕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신라왕은 먼저 시마네 지방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나갔고 동쪽으로 정벌(神武東征)에 나서 마침내 일본열도를 모두 정복하고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아마테라스와 신라왕 스사노오 사이의 관계가 나빠져 신라는 당(唐)을 끌어들였고 일본은 백제와 힘을 합쳐 대결하였으나 실패하여 마침내 한반도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풍신수길의 조선정벌은 이러한 신라의 배신에 대한 당연한 댓가이며 이제부터라도 한반도는 다시 천황가의 영토로 편입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한일동조론(韓日同祖論)의 일환으로 일본천황의 한반도유래설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설화와 정황 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구당서에는 왜(倭)와 일본이 별도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초기에는 일본열도에 왜(倭)와 일본이 별도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왜(倭)가 일본으로 통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과 별도로 존재했다는 그 왜(倭)가 바로 임나와 임나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을 아울러 일컫는 명칭이었다는 것이다. 또 가라의 건국신화인 수로왕 설화와 일본의 건국신화인 니니기 설화가 매우 유사하다거나 언어학 연구에서 고대 일본어와 임나어 그리고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가 동일계라거나 또 경상도 사투리가 소리변화를 거쳐 일본어의 뿌리가 되었다는 주장 등이 일본천황가의 임나유래설을 뒷받침한다.
1948년 도쿄대학의 강상파부(江上波夫 えがみ なみお) 교수는 민족학연구라는 학술지에서 개최한 '일본 문화의 원류와 일본 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일본천황가의 기원이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었다는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발표했다. 이후 이 가설을 이어받아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왔는데 1975년 콜럼비아 대학의 레드야드 교수는 서기 346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궁지에 몰린 부여족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복왕조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을 제시했고 서울대학교의 홍원탁 교수는 서기 369년 마한을 완전히 정복한 백제가 일본열도까지 진출하여 정복왕조를 세웠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일본 천황가의 출발이 한반도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주장 중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의 사서에서 암흑지대로 남아있는 임나와 연결되는 가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가 부여에서 나왔다고 공공연히 주장한 백제 왕조나 조상이 흉노에서 나왔다고 금석문에 새긴 신라 김씨왕조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일본 천황가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숨길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일본 천황가의 혈통이 중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으로 교체되었다는 주장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송서에 나오는 왜왕 무(武)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이라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일본서기(720)에 의하면 무령왕은 461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바로 백제로 보내졌다가 502년에 백제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에(1145)에는 501년에 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다. 왜왕 무(武)는 송서(488), 남제서(537) 그리고 양서(636)에 478년부터 502년까지 남조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무령왕이 백제로 보내졌다가 다시 왜(倭)로 돌아갔다고 가정하면 무(武)와 무령왕이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시간적으로 성립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475년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왕족들을 몰살했는데도 무령왕이 살아남은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
478년에 무(武)가 송(劉宋)에 보냈다는 표문은 이런 가설에 무게를 더 실어 준다.

송서(宋書 488)
「封國偏遠,作藩于外,自昔祖禰,躬擐甲冑,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逕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讎,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

이 표문의 내용은 고려에 대한 맹비난과 고려 침공을 준비하던 무(武)의 아버지와 형이 죽는 바람에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은 고려의 침공을 받아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뒤를 이은 형마저 죽은 무령왕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그러나 송서(488)의 다른 기록을 보면 찬(贊)-진(珍)-제(濟)-흥(興)-무(武)로 이어지는 왜왕의 혈통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720)나 삼국사기에(1145)에도 개로왕에서 무령왕으로 이어지는 혈통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무(武)가 무령왕이라는 주장은 매우 많은 기록을 부정해야만 하는 한계가 있다.



우전팔번(すだはちまん)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인물화상경의 명문을 가지고 계체 천황(재위 507-531)이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의 친동생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우전팔번 신사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443/503)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제왕이 의자사가(おしさか)궁에 있을 때 사마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여기서 사마와 남제왕을 각각 무령왕과 계체 천황으로 보고 계미년을 503년으로 보면, 무령왕이 아우인 계체 천황에게 거울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斯麻)인 것은 여러 기록에 나와 있고 계체 천황은 천황으로 추대되기 전에 지방을 다스리던 왕으로 남대적왕(男大迹王)이라 불렸다. 백제와 왜(倭)의 친분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런 교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인물화상경에 나오는 男弟王은 男大迹王을 가리키는 말이지 남동생을 말한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서기(720)에는 계체 천황이 응신 천황의 5세손으로 나와 있다.
계체 천황의 전임인 무렬 천황은 후손이 없었다. 남대적왕이 천황으로 추대되기 수 년 전에 무령왕이 남대적왕과 교류를 쌓고 있었다면 그의 외교적 감각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 덕분인지 백제는 계체 천황 시기에 왜(倭)로부터 임나4현, 기문 그리고 다사진에 대한 점유를 차례로 인정받았다.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가지고 민달 천황이 백제 왕가의 혈통이라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사람도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815)
大原真人 出自謚敏達孫百済王也
대원진인이라는 씨족은 민달 천황의 손자 백제왕으로부터 나왔다.
島根真人 大原真人同祖 百済親王之後也
도근진인이라는 씨족은 대원진인과 같은 조상인 백제친왕의 후손이다.

요약하면, 민달 천황의 손자가 백제왕이고 이 백제왕으로부터 대원진인과 도근진인이라는 씨족이 나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백제왕을 말 그대로 백제의 왕 또는 백제의 왕족이라고 보면, 손자가 백제 왕가의 혈통이니 민달천황도 당연히 백제 왕가의 혈통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백제왕을 백제에서 왕위에 올랐던 사람으로 해석하면 민달 천황의 손자가 백제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또 왕이라는 칭호가 왕족이나 귀족에게 내리는 작위로 쓰이는 경우도 많으므로 민달 천황의 손자가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신찬성씨록이 편찬될 무렵에는 왜왕의 칭호가 천황이었고 왕은 그 아랫 단계에 있는 칭호니 이런 설명이 더 자연스럽다.
속일본기에는 '한국'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성씨를 바꾸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씨에 표시된 국명이 꼭 그 나라 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민달천황의 손자 이름에 들어가 있는 '백제'도 꼭 백제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790-11-10 속일본기(續日本紀 797)
외종5위하 한국연원(韓國連源) 등이, “원(源) 등은 물부대련(物部大連) 등의 후손입니다. 무릇 물부련(物部連) 등은 각각 사는 지역과 하는 일에 따라 180개의 성씨로 갈라졌습니다. 이에 원(源) 등의 선조 염아는 부조(父祖)가 사신으로 간 나라의 이름으로써 물부련(物部連)을 고쳐 한국련(韓國連)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즉 (저희들은) 대련(大連)의 후손이고 곧 일본의 옛 백성인데 지금 한국(韓國)이라 부르고 있으니, 삼한에서 새로 도래한 듯하여 부를 때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합니다. 사는 지역에 따라 성(姓)을 내리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법칙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국(韓國) 두 글자를 고쳐 고원(高原)을 내려 주십시오”라 하니, 청에 따라 들어주었다.

이 밖에도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유래했거나 한반도 이주민에 의해 교체되었다는 주장은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부분 알비뇨 까마귀를 가지고 와서 까마귀는 희다는 식의 주장이다. 그러나 까마귀는 검은 것이 훨씬 많다.
이렇게 일본천황가의 한반도유래설은 그 내용이 각기 다르지만 ‘일본천황가가 역사를 세탁하여 자신들의 뿌리를 숨겼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왕조가 역사를 완벽하게 세탁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설사 일본 내에서는 완벽하게 세탁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이나 중국의 기록에는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속일본기의 아래 기록을 보면 천황의 친모가 백제왕의 후손인 것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는데,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그것을 숨길 것 같은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789-12-14 속일본기(續日本紀 797)
황태후의 성은 화(和)씨이고 이름은 신립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純陁)태자에서 나왔다. 금상(환무천황)과 한량친왕, 능등내친왕을 낳았다. 그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순타는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가 513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0790-02-27 속일본기(續日本紀 797)
정5위상 문실진인 고도·백제왕 현경에게 모두 종5위하를 주고, 종5위상 백제왕 인정에게 정5위상, …… 정6위상 백제왕 경인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이 날 조(詔)를 내려, “백제왕(百濟王) 등은 짐(朕)의 외척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두 사람을 발탁하여 작위를 더하여 준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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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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