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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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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신라민족론] (7)-4 금시조 한국인 후손설
이태엽 at 2014-01-09 08:12 /
URL http://kallery.net/s.php?i=381



금(金)시조 한국인 후손설은 금(金)시조 아골타가 한국에서 건너간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아래는 이러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서의 기록이다.

1156 송막기문(松漠紀聞 宋 洪皓)
女真酋長乃新羅人,號完顏氏。여진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金主九代祖名龕福,금황제의 9대조는 감복인데, ...
龕福(감복) - 訛魯(와로) - 佯海(양해) - 隨闊(수활) - 實魯(실로) - 胡來(호래) - 核里頗(핵리파) - 蒲刺束(포자속) - 楊哥(양가) - 吳刺束(오자속) - 阿骨打(아골타)

1194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南宋 徐夢莘)
神麓記曰女真始祖掯浦出自新羅奔至阿觸胡無所歸遂依完顏因而氏焉 
신록기에서 말하길, 여진의 시조 긍포는 신라에서 도망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는데 돌아갈 곳이 없었다. 완안에 의지하여 그것이 성씨가 되었다. 
後女真眾酋結盟推為首領生訛辣魯繼其父業訛辣魯生佯海佯海生隨闊自幼習射采生長而善騎射獵 
나중에 여진 사람들이 수령으로 추대하였다. 
掯浦(긍포) - 訛辣魯(와랄로) - 佯海(양해) - 隨闊(수활)
(삼조북맹회편은 송막기문과 신록기를 모두 참고하고 있다. 송막기문과 신록기의 이야기는 서로 조금 다르다.)

1202 건염이래조야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
完顏之始祖指蒲者新羅人自新羅奔女真女真諸酋推為首領七傳至旻而始大所謂阿骨打也 
완안의 시조 지포(指蒲)는 신라인인데, 신라에서 여진으로 도망가자 여진의 여러 추장이 수령으로 추대했다. 7대를 지나자 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가 아골타다.

1317 문헌통고(文獻通考 元 馬端臨)
又云其酋本新羅人,號完顏氏,猶漢言王也。
또 그 추장은 원래 신라인인데 완안씨라 불렀다. 한자음으로 왕과 같다.
龕福(감복) - 訛魯(와로) - 洋海(양해) - 隨闊(수활) - 實魯(실로) - 胡來(호래)...
호래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核裏頗(핵리파)이고 둘째는 蒲刺束(포자속)이고 셋째는 楊割(양할)이다.
핵리파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吳刺東(오자속)이고 둘째는 阿骨打(아골타)이고 셋째는 吳乞買(오걸매)이고 넷째는 撒(살)이다.

1344 금사(金史 元 脫脫)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고려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형은 아고내인데 불교를 좋아해서 따라오지 않고 고려에 남으며 말하길 "후손들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니 나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우인 보활리만 데리고 왔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 물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에 살았다.

1454 고려사(高麗史)
1109-06 요불(여진의 사신) 등이 다음과 같이 애걸했다. "옛날 우리 태사인 영가(盈歌)가 일찍이, 우리 조상도 큰 나라인 고려 출신이니 자손 대대까지 귀부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현재 태사를 맡고 있는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1454 고려사(高麗史)
1115-01 옛날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선조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애초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는,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古乙)태사라 했다. 고을이 활라(活羅)태사를 낳았고, 활라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슬기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했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인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

1636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金世濂)
지금 나라 안의 김(金) 성이 거의 신라의 후예이고, 김부(경순왕)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그 외손 완안 아골타는 곧 권행(權幸)의 후예인데, 중국을 분할하여 다스리고 백 년 동안 대를 이었으니, 어찌 신명의 후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1783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新羅王金姓相傳数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金史地理志乃云以國有金水源為名史家附㑹之詞未足憑耳 
신라 왕성 김(金)이 수십 대를 이어 왔으므로 금(金)이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나라의 이름 역시 당연히 여기서 나온 것이다. 금사지리지에는 금수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가들이 왜곡한 것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

송막기문(松漠紀聞 1156)은 남송의 홍호(1088-1155)가 1129년에 금(金)에 파견되었다가 1143년까지 유배되어 있으면서 기록한 견문록이다. 여진은 원래 문자가 없어 금황실의 역사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금(金)이 건국되고 여진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구전되던 금황실의 역사도 채록되어 책으로 엮어졌다. 그 작업은 마침 홍호가 금(金)에 파견되던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금황제의 9대조가 한국에서 여진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는,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으면, 약 225년 전의 일이다. 그러면 대충 900년 전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때는 한국에서 신라와 왕씨고려의 왕조교체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것으로 아골타의 선조에 대해 사서에 따라 신라인과 왕고인으로 다르게 기술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막 왕고로 교체된 시기에 건너갔다면 그 사람을 신라인으로 표기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고 신라 말기에 건너갔다고 하더라도 사서가 쓰인 시기가 이미 왕고로 교체된 지 오래되었다면 왕고에서 갔다고 표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사례는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보장왕의 손자인 고진(699-773)은 당(唐)에서 벼슬을 하다 죽었는데 그의 묘지명에는 그가 발해인이었다고 새겨져 있다. 그의 선조는 고려인이었고 그는 당나라 사람이었으며 발해는 그가 태어난 지 십 수 년이 지난 713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국호였으니 그를 발해인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고려가 이미 없어졌고 그 자리에 발해가 들어서 있었으므로 발해인이라고 새긴 것이다. 
함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에서 왕씨고려로의 왕조교체가 일어난 지 200여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때 굳이 함보를 신라인이라 기술한 것을 보면 함보가 만주로 건너간 시기는 왕조교체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금사(1344) 이전의 기록에 신라인으로 기록되던 함보가 이후부터 왕고인으로 바뀐 것을 보면 그런 심증이 더욱 굳어진다. 
한국에서 여진으로 건너간 아골타의 선조에 대해서는 기록이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송막기문(1156)에서 시작해서 금사(1344)로 이어지는 중국의 사서에는 감복(龕福) 또는 함보(函普)로 되어 있고 고려사(1454)에서 시작해서 동명해사록(1636)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사서에는 금준(今俊), 김극수(金克守), 권행(權幸)의 후예 등으로 되어 있다. 
시기로 보나 정보의 근접성으로 보나 당연히 전자가 더 믿을 만하다. 후자는 일단 후대에 이야기가 변형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감복(龕福) 또는 함보(函普)는 여진에서 불렸던 이름이고 한국에서는 금준(今俊) 또는 김극수(金克守)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고려사와 동명해사록이 각각 김행(金幸)과 권행(權幸)으로 엇갈리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행의 본래 성은 경주김씨였고 신라와 왕고의 왕조교체기에 안동권씨로 바뀐 것이므로 권행을 김행으로 표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동명해사록에서 권행을 경순왕의 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동권씨가 경주김씨에서 나왔다면 경주김씨인 경순왕의 외손이 역시 경주김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왕족들은 족내혼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경주김씨의 외손이 역시 경주김씨가 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아골타의 선조에 대해서 여러 사서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뽑아낼 수 있다. 바로 '여진으로 건너간 한국인이 그곳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후대에 제국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이성계의 선조가 전주에서 여진의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 부락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절대 어색하지 않다. 따라서 금시조 한국인 후손설은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금(金)과 청(淸)이 한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정체성과 왕조의 혈통은 별개기 때문이다.
한편, 위의 만주원류고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금(金)이라는 국호의 유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1344 금사(金史 元 脫脫)
上曰:「遼以賓鐵爲號,取其堅也。賓鐵雖堅,終亦變壞,惟金不變不壞。金之色白,完顏部色尚白。」于是國號大金,改元收國。아골타가 말하기를 "요나라는 쇠로 이름을 지어 견고함을 취했다. 쇠는 견고하나 결국 녹슬고 망가지는데 오직 금만 변하지도 않고 망가지지도 않는다. 금빛은 밝고 완안부의 빛 또한 밝다."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라 하고 연호를 수국으로 고쳤다.

1344 금사(金史 元 脫脫)
上京路,即海古之地,金之舊土也,國言「金」曰「按出虎」,按出虎水源於此,故名金源,建國之號蓋取諸此。상경로(黑龍江省哈爾濱市阿城區白城遺址)는 해고의 땅인데 금(金)의 옛 땅이다. 나랏말에 금을 안출호라 하는데, 안출호수(阿什河)가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금원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이 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름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아골타의 주장에는 요(遼)와의 대결의식이 묻어 있고 만주원류고의 주장에는 청(淸)의 정통성을 꾸미려는 의도가 묻어 있다. 청(淸)은 금(金)의 계승을 표방하였는데 그 금(金) 또한 신라라는 더 깊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청(淸) 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에서도 보인다.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아이신지오로(aisin gioro)로 발음된다. 여기서 아이신(愛新)은 우리 성씨의 본관(族名)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주어로 금(gold)을 뜻하므로 금(金) 황실의 계승자를 자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각라(覺羅)는 우리의 성(姓氏)에 해당하는데 귀족들이 차는 홍색 허리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청(淸) 황실의 후손들은 愛新覺羅(아이신지오로)라는 성을 쓰지 않고 金(진)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다.



[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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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12-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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