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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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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신라민족론] (6) 왕씨고려는 고려를 계승하였나? (II) - 요동사
이태엽 at 2012-06-11 03:47
URL http://kallery.net/s.php?i=377

요동사(遼東史)
요하 동쪽의 역사는 분명 한국사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사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점이 매우 많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지역의 역사를 요동사라 하여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닌 제3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동북아시아의 역사가 매우 명쾌하게 정리되는 이점이 있다.



이 요동사의 출발점은 조선(朝鮮)이다.
조선은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燕)에 복속되었다. 이후 서기전 221년 진(秦)이 연(燕)을 포함한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은 다시 진(秦)에 소속되었다. 진(秦)은 진승, 항우 등이 난을 일으켜 혼란해 졌는데, 이때 연(燕)·제(齊)·조(趙) 지역의 백성 수만명이 조선, 진번 그리고 한국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진(秦)이 망하고 서기전 202년에 한(漢)이 다시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때 조선은 한(漢)의 영역에서 빠졌다. 그러자 서기전 195년경 한(漢)의 제후국이 된 연(燕)의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했다가 중국의 유민과 토착민을 규합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진번, 임둔, 옥저 그리고 고구려까지 복속시키며 성장하였으나 우거왕 때 다시 한(漢)의 침략을 받아 병합되었다.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을 병합한 한(漢)은 이 지역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소속시켰다.
서기전 82년 한(漢)은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고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와 예(濊)는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에 예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도 폐지하고 토착세력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복잡한 변천과정을 거쳐갔던 이들 군(郡)들을 통틀어 동방변군(東方邊郡)이라 칭하기도 한다. 
부여와 고려는 원래 현도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내 통제에서 벗어났고 한(韓)과 예(濊)는 한나라 말기에 낙랑군의 유민들을 많이 흡수하였다. 
190년 요동태수 공손탁이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을 칭하며 한(漢)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부여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 들였다. 그의 아들 공손강에 이르러서는 고려를 침공하고 낙랑군에서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던 한(漢)의 유민을 모으고 한(韓)과 예(濊)를 침공하여 대방에 복속시켰다.
한(漢)을 이은 위(曹魏)는 238년에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을 토벌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어 위(曹魏)는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고 낙랑군과 대방군도 고려에 복속했던 예(濊)를 침공하여 다시 복종을 받아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韓)도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낙랑군과 대방군은은 위(曹魏)를 이은 진(司馬晋 西晋)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 진(西晋)이 망할 무렵인 313년과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낙랑군은 중국에서 태수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또 낙랑군에는 한족(漢族)이 많이 이주해 와 살았는데, 이것은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목간에 서기전 45년의 낙랑 인구 14%가 한족이었다고 되어 있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발달된 중원의 문화를 들여와 주변으로 퍼뜨렸다. 그래서 낙랑군이 존재했던 시기만을 놓고 볼 때는 낙랑군이 요동사가 아닌 중국사에 속한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낙랑군이 이전의 조선을 이었고 또 이후의 고려에 이어진다는 전후의 흐름을 생각해 보면 낙랑군은 기본적으로 요동사의 흐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요동사의 다른 때에 비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기였을 뿐이다.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마한이 10만호, 변진한이 4-5만호, 야마대국이 7만호였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부여는 8만호, 고려는 3만호, 예(濊)는 2만호, 동옥저는 5천호였다고 되어 있다. 변진한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마한은 한강 하류 지역을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 이남만 가지고는 그런 규모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기전 91년에 편찬된 사기에는 진번이 항상 조선과 묶여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과 인접한 동일 문화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록의 정황 상 조선의 남쪽에 있었다고 설정하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진번의 남쪽 경계는 신라가 한국통일을 완성하였을 때의 북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하게 된다.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난 뒤 임둔은 진번과 함께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 서기전 128년 예군(濊君) 남려는 위만조선을 배반하고 28만명을 들어 요동에 귀속하였는데, 이때 한나라는 그 지역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몇 년 후 폐지하였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도 설치하였다. 서기전 82년 한나라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쳤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치소를 옥저에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단단대령 동쪽은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군에 소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마저 없애고 토착세력에게 자치권을 넘겨주었다.
임둔이 예(濊)라는 기록은 없지만 이러한 앞뒤의 정황을 볼때 임둔을 예(濊)로 설정하면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럽게 된다. 그렇게 하면 임둔군은 이전의 창해군을 이은 것이 된다.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변진한이 4-5만호, 고려가 3만호, 예(濊)가 2만호, 동옥저가 5천호였다고 되어 있다. 이런 예(濊)의 규모에 맞고 기록에 나오는 정황에도 부합하는 지역은 영흥만 일대다. 그렇다면 단단대령은 철령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044 후한서(後漢書 445)
한(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245? 삼국지(三國志 289)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한 8국은 처음에 진번군이나 임둔군에 소속되었다가 나중에 남부도위나 동부도위에서 빠진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철령과 태백산 사이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염사읍군 또한 정황상 이 지역과 가장 잘 어울린다.
동방변군이 있던 시기에 요동에는 여러 종족들이 있었다.
조선의 남쪽에는 진번이 있었고 동쪽에는 예(濊)가 있었으며 북쪽에는 맥(貊)이 있었다. 동해안을 따라 예(濊)의 북쪽에 옥저가 있었고 맥(貊)의 북방에는 부여가 있었다. 부여의 동쪽에는 산림에서 살아가는 읍루가 있었고 서쪽에는 유목민인 선비가 있었다. 읍루와 선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사한 농경민이었다.
예(濊)와 맥(貊)은 합쳐져 예맥(濊貊)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강한 친연성을 암시한다. 고려는 맥인(貊人)으로 인식되었는데 예(濊)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또 동이의 옛 말에 의하면 고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였다. 부여의 도장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그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위만은 나라를 세우고 옥저를 복속시켰는데 이때 예(濊)와 고려도 함께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맥(貊)의 다섯 부족 연맹체에서 출발하여 동방변군을 밀어내고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과는 요하를 경계로 맞서고 한국과는 한강유역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이 589년 수(隋)/당(唐) 제국으로 통일되자 고려는 중국의 침략을 받게 된다.
마침내 668년 신라의 협력을 받은 당(唐)의 공격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당(唐)은 고려왕 고장을 비롯한 고려의 지배세력들을 당(唐)으로 데려가 당(唐)의 지배체제에 편입시켰으며 고려인들도 중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옛 고려의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전에 고려는 313년에 낙랑을 병합하고 427년에 도읍을 옛 낙랑의 중심지인 평양으로 옮기면서 조선-낙랑으로 이어지는 요동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였다. 또 옛 낙랑과 대방 지역을 통하여 중국의 문화도 활발히 흡수하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무덤벽화가 그 좋은 예가 된다.
한(漢)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중원의 무덤벽화는 한(漢)의 쇠퇴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북중국과 요동에서는 오히려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고려의 벽화무덤은 현재까지 10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대동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중류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축조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연(燕)나라 출신 동수의 묘로 357년에 만들어졌고 옛 대방 지역에 위치해 있다. 고려의 무덤벽화에 나오는 수렵도, 씨름도, 사신도, 삼족오 등은 모두 중국에서 그 소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벽화무덤은 발해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신라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편, 발해(渤海)는 고려가 망한 지 30여년 뒤인 698년 고려의 유민 대조영이 세운 왕조인데 200여 년 간 왕조를 이어가다 926년 요(遼)에 병합되었다.
발해는 중심지와 주류 종족이 고려와 다르지만 당(唐)이나 신라에 비해 고려의 영토와 백성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또 스스로도 고려의 계승국을 표방함으로써 고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요동사의 계통은 부정하기 힘들다.

0728 속일본기(続日本紀 797 日本)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무예(무왕)는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무대의 중심지가 대동강 유역에서 만주로 이동하였고 주류 종족이 말갈족으로 바뀐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요나라와 왕고가 국경분쟁을 일으킬 당시의 지도에 옛 고려와 발해의 영역을 표시해 보았다.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이때 한국에서도 신라에서 왕고로 왕조가 교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발해를 병합할 때 요(遼)는 발해왕 대인선을 비롯한 발해의 지배세력들을 요(遼)로 데려가 요(遼)의 지배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일반 백성들도 다수 요(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옛 발해의 땅에는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요(遼)의 세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요(遼)는 200여 년 간 존속하다 1125년 금(金)에 망했다.
요(遼)는 2중적인 통치제제를 운영했는데, 유목민들은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리고 중국인과 발해인은 중국식 군현제도로 다스렸다. 이로 미루어 보아 거란은 중국은 물론 발해와도 매우 이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계통에 있어서는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려-발해를 잇는 요동사의 계통을 흡수했다고 자처하고 있었다.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遼本朝鮮故壤,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蓋有存者。
요나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인데 기자의 여덟 가지 가르침이 풍속으로 전해져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周) 무왕이 갇혀 있는 기자를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는데 이로 인해 그에게 조선을 봉해주었다. ... 한(漢)나라 초기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빈 땅의 왕이 되었다. 무제 원봉3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다. ... 당(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나중에 발해의 대씨(대조영)차지가 되었다. ... 태조(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워 발해를 공격하고 ...

요(遼)의 이런 인식은 고려계승을 내세운 왕고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099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2)
거란의 소손녕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을 쳐서 우리 선봉군사인 급사중 윤서안 등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하니, 소손녕이 성명하기를, “대조(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대조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는데 말씨가 강개하니,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사실대로 거란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에서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전쟁을 중지합시다." 
하였다.

소손녕의 요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요(遼)와 왕고의 역학관계에 걸맞게 왕고는 요(遼)를 섬겨라.
(2) 왕고는 요(遼)와 경쟁관계에 있는 송(趙宋)을 섬기지 말라.
(3) 고려의 옛 땅은 요(遼)의 것이니 왕고가 차지한 고려의 옛 땅을 요(遼)에 돌려 달라.

이에 대해 서희는 왕고가 고려를 계승하였으므로 고려의 옛 땅을 돌려줄 수 없으며, 오히려 지금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쫓아내고 그 땅을 왕고가 차지하게 해 준다면 여진에 막혀 하지 못했던 요(遼)에 대한 조빙을 할 수 있다는 대답을 한다. 이것은 (3)을 양보하면 (1)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이 협상은 타결되어 요(遼)는 군대를 물리고 왕고는 압록강 이남의 땅을 차지한 뒤 요(遼)를 섬기게 된다.
(2)는 이듬해에 자연스럽게 실현되었다.

099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2)
원욱을 송(趙宋)에 보내어 군사를 얻어 지난해의 전쟁을 보복하기를 청했더니, 송(趙宋)은 북쪽 변방이 겨우 편안해졌는데 경솔하게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송(趙宋)과 국교를 끊었다.

그런데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 타결된 이러한 협상결과는 요(遼)가 왕고의 고려계승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송나라와 대결하는 입장에서 요(遼)는 왕고와의 전쟁이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이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요(遼)가 왕고의 고려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왕고의 왕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0995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고려왕을 삼한국공에 봉하고 그의 아비를 고려국왕으로 추증했다.

1100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1099년 왕옹(王顒 숙종)이 책봉을 요청하였다. 1100년 옹(顒)을 책봉하여 삼한국공으로 삼았다.

국호를 고려라 칭했으니 고려국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고려가 아니라 신라의 전신인 삼한으로 왕고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왕고가 내세운 '고려계승'은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고려계승이 가지는 첫 번째 기능이다.
그런데 고려계승의 기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방 제국과의 영토분쟁에서 명분을 확보하는 데도 유용하게 작용하였다. 이것이 고려계승이 지니는 두 번째 기능이다.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왕씨왕조가 내세운 고려계승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정리하였다.
먼저 한국(韓國)이 아닌 고려를 한국의 신라 및 백제와 하나로 묶어 단일한 역사공동체로 만들었다. 또 원래 한국의 땅이었던 신라의 한주, 삭주 그리고 명주를 옛 고려의 땅인 것처럼 투사시켜 놓았다. 이것은 신라에서 나온 왕고가 고려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신라 안에 고려가 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려를 계승한 발해의 존재는 언급이 최소화되고 말갈국가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요(遼)와 금(金)으로 흡수되는 발해가 고려를 계승하였다면 왕씨왕조의 고려계승 주장이 무색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삼국사기 덕분인지 금(金) 이후로는 고려계승문제로 시비를 거는 나라가 최근까지 없었다.
한편, 말갈에 대한 요(遼)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아골타가 말갈 부족들을 통합하고 요(遼)를 격파한 후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이후 금(金)은 1125년에 요(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趙宋)마저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왕조가 오래가지는 못하고 1234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금사에는 금(金)의 유래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다.

금사(金史 1345 元 脫脫)
금(金)의 선조는 말갈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물길이라 불렀는데 물길은 옛 숙신 땅에 있었다. 위(魏 북위)나라 시기에 물길은 속말부, 백돌부, 안차골부, 불녈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 등 7부가 있었다. 수(隋)나라 때는 말갈이라 칭했는데 7부가 병존했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는데 나머지 5부는 잘 모른다. 속말말갈은 처음에 고려에 부속되었는데 성씨는 대씨다. 이적이 고려를 격파하자 속말말갈은 동모산을 지켰고 후에 발해가 되어 왕을 칭했는데 10여세(世)를 이었다. ...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남쪽으로는 고려에 접했으며 역시 고려에 부속되었다. 일찍이 15만 병력으로 당태종에 맞선 고려를 도왔으나 안시에서 패하였다. 당나라 현종 때 내조하였다. ... 훗날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는 발해에 복속되어 마침내 조공이 끊겼다. 오대시대에 거란이 발해를 병합하자 흑수말갈도 거란에 복속되었다.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에 적을 두었는데 숙여진이라 부르고 북쪽에 있는 것은 거란에 적을 두지 않았는데 생여진이라 불렀다. 생여진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는데 혼동강은 흑룡강이라고도 불렀다. 소위 말하는 백산흑수는 이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발해인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간략히 정리해 볼 수 있다.
속말말갈은 흑수말갈과 함께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고려가 당(唐)에 의해 망하고 고려인이 중국 각지로 이주를 당하자 당(唐)으로부터 독립하여 발해를 세운다. 이후 이들은 발해인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 발해 또한 요(遼)에 의해 망하고 발해인도 요동 등지로 이주를 당한다. 발해인과 함께 요(遼)에 복속해 있던 흑수말갈은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분화하였는데 생여진에서 나온 금(金)이 요(遼)를 멸망시키고 역시 발해인을 산동 등지로 이주시켰다. 이후 발해인은 점차 정체성이 사라졌다.
금(金)이 망한 후 요동은 원(元)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원(元)은 명(明)에 의해 1368년에 중원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이즈음 여진도 원(元)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이때 한국에서도 왕고에서 이조로의 왕조교체가 있었다.)
이후 여진은 명(明)의 회유와 견제를 받게 되는데 통합되어 있지 못하고 야인여진(野人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건주여진(建洲女眞)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 159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침략에 명(明)이 참전하여 국력을 소진하자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에 금(後金)을 세웠다.
이후 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중국대륙마저 정복하였다.
수 백 년 뒤 청(淸)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데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이듬해에 왕조가 해체되었다. (이 즈음 한국의 이씨왕조도 통치권을 잃고 한국은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만주원류고에는 청(淸)의 건국설화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1778 淸)
長白山之東有布庫哩山其下有池曰布勒瑚里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라는 산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포륵호리라는 연못이 있었다.
相傳三天女浴于池有神鵲銜朱果置季女衣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신령스러운 까치가 날아와 세째 선녀의 옷 위에 빨간 열매를 놓고 갔다.
季女含口中忽已入腹遂有身尋
세째 선녀가 그 열매를 입에 넣자 뱃속으로 들어가 임신이 되었다.
產一男生而能言體貌奇異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고 신체가 특이하였다.
及長天女告以吞米果之故因錫之姓曰愛新覺羅名之曰布庫哩雍順
아이가 자라자 선녀는 태어난 내력을 알려주고 애신각라란 성과 포고리옹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與之小舠且曰天生汝以定亂國其往治之
작은 거룻배를 주며 하늘이 너를 낳았으니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아 다스리라고 하였다.
天女遂凌空去于是乘舠順流至河歩折柳枝及野蒿為坐具端坐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거룻배를 타고 내려가 강에 이르러 버들가지와 쑥을 꺾어 자리를 만들고 단좌하고 앉아 있었다.
以時長白山東南鄂謨輝之地有三姓爭為雄長日構兵相仇殺適
이때 장백산 동남쪽 악모휘에는 세 성씨가 있었는데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고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一人取水河歩歸語眾曰汝等勿爭吾取水河歩見一男子察其貌非常人也天不虛生此人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다가 포고리옹순을 보고는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싸우지들 말고 내 얘기 들어 보소. 물을 길러 갔다가 범상치 않은 사람을 봤는데 하늘이 내린 사람이 틀림없는 거 같소."라고 하였다.
眾皆趨問答曰我天女所生以定汝等之亂者且告以姓名
사람들이 포고리옹순에게 몰려와 물어보므로 "나는 선녀의 아들로 너희들의 분란을 해결하러 왔다"며 성과 이름을 알려주었다.
眾曰此天生聖人也不可使之徒行遂交手為舁迎至家三姓者議推為主遂妻以女奉為貝勒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 생각하고 손가마에 태워 데려가 세 성씨 모두 그를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한 여자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居長白山東鄂多理城建號滿洲
장백산 동쪽 악다리성에 정착하여 나라의 이름을 만주라 하였다.

이 청(淸)이 망한 후 요동은 중화민국 군벌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다 1932년 일본이 들어와 이 지역의 군벌을 몰아내고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길림성 장춘(당시 명칭은 新京)에 있었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국가원수로 내세운 입헌군주제의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 관동군에 의해 지탱되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만주국은 만주족과 한족이 토대가 되었으나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주하여 다민족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만주국은 중국으로 귀속되고 일본과 한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만주국을 끝으로 일단 요동사는 중국사에 통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漢)과 원(元)의 경우를 되돌아보면, 미래에도 요동이 중국에서 다시 분리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중국, 요동, 한국 그리고 일본 이렇게 네 역사공동체로 이루어진 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중 유독 한국은 요동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고전하였는데 이는 영토, 인구 그리고 생산력 등에 있어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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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06-15 09:13 
자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흉악범...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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