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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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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신라민족론] (3)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IV) - 임나사
이태엽 at 2011-07-20 23:51
URL http://kallery.net/s.php?i=127



임나사(任那史)
낙동강 하류지역은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 변한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세 종족이 있는데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弁韓)이 그것이다. 진한과 변한은 모두 24국인데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優由國이 그것이다. 이 중 열 두 나라는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앉혀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한의 독로국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그리고 왜(倭)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가며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하였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대방에서 왜(倭)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 남쪽으로 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가면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이 시기 왜(倭)는 30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야마대국은 7만여 호나 되었다. 한(韓)이 78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마한이 10여만 호고 변진이 4-5만 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왜(倭)가 한(韓)보다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의 여왕 비미호는 238년부터 대방을 통해 위(曹魏)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한(韓)에는 뚜렷한 중심 국가나 왕이 없었고 낙랑과 대방의 통제를 받기도 했다. 이후 낙랑과 대방은 약화되어 313년과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고 만다. 그리고 마한의 한강 유역과 진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변한과 마한의 금강 이남은 미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기 전에 왜(倭)의 지배를 받게 된다.



391 광개토왕릉비(414)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391년에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 신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391-03(<24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백제가)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比利·辟中·布彌支·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400 광개토왕릉비(414)
1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때쯤에는 변한지역이 임나(任那)로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가야(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모형을 따르기로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염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이것은 562년의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임나를 구성하는 작은 나라는 391년 이후 계속 변해왔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 이 세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니 임나나 낙랑의 역사는 단편적인 이야기만 담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서기는 임나가 천황 중심의 세계관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좋은 소재가 되고 임나에 관한 백제의 기록도 비교적 풍부하였기 때문에 임나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담아 놓았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임나에 관한 역사를 정리해 본다.
여기서 잠깐 임나의 영역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임나가 영남지역의 낙동강 중하류 서쪽이었다고만 알아 왔다. 그런데 최근 호남지역에서 5~6세기경의 임나계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그것도 일부 지역이 아니라 전남 신안, 영암 그리고 전북 남원, 장수 등 전라도 전 지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호남지역도 임나의 영역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은 사서의 기록과도 잘 어울린다.

<습진언의 고립>
403(<283)일본서기(日本書紀 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 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405-08(<28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평군 목토숙니와 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이 사건은 일본열도에서 바다 건너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왜인이 상주하며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일에 참견할 수 있는 기구를 한반도에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국사(任那國司)나 일본부(日本府)는 그러한 필요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전협과 제군의 반란>
46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길비상도신 전협은 궁중에서 시종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치원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워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 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
천황(웅략천황)이 귀를 기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天皇 傾耳遙聽 而心悅焉). 
곧 자기가 치원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전협을 임나국사(倭가 임나에 파견한 관리)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치원과 동침하였다.
전협신은 치원에게 장가들어 형군과 제군을 낳았었다.
전협은 이미 임지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중국(倭는 자신들을 중국이라 칭하기도 했다)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길비 해부직적미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징벌하라.”
고 하였다. 
이 때 서한 재기 환인지리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한국(韓 또는 韓國은 좁은 의미로 백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환인지리를 제군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
고 명하였다. 
이에 제군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로 변하여 홀연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군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
라고 대답하였다. 
제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친 재주좋은 사람들을 큰 섬 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 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임나국사 전협신은 제군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제군에게 경계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汝之領項 有何罕錮而伐人乎).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 이제 화가 나에게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임나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제군의 아내 장원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군신의 의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해부직적미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천황은 제군이 죽은 것을 알고 일응길사 토견고안전을 보내어 함께 복명하게 했다.

이 사건은 한반도 남부를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가 오히려 왜(倭)왕조에 대한 반란의 근거지로 이용된 사례다.

<신라구원>
464-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웅략)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중국(倭)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고려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인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선신 등이 아직 군영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군중에 령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 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지도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 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선신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 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신라와 고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

이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는 399년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에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 왜(倭)를 격퇴시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과는 고려와 왜(倭)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별로 어색한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418년에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러 왜(倭)에 갔을 때 고려군이 신라의 국경 바깥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어야 자연스러워지는 이야기다. 또 제작 연대가 449년으로 추정되는 중원고려비에는 新羅土內幢主(신라 내에 있는 군대의 지휘관)란 구절이 있는데, 이것도 신라에 고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는 당시 임나에 왜(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듯이 임나에 왜군이 주둔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임나에 왜군이 주둔했던 사실은 고고학적 증거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는 1990년대부터 전방후원분이 발견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14기가 발견되었다. 이 전방후원분은 전형적인 왜(倭)의 무덤양식으로 이곳에서는 왜(倭)의 무기류도 출토되고 있다. 왜인 무장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들 전방후원분이 축조된 시기는 500년을 전후한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로 추정된다.
이 전방후원분을 두고 몇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다.
첫째는 475년 백제가 고려의 침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살해된 사건과 연결한 설명으로, 왜(倭)가 고려의 압박을 받고 있는 백제 왕조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주둔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는 479년 동성왕이 귀국할 때 함께 온 축자국 군사 500인과 연결한 설명으로, 이 군사들이 영산강 유역에 주둔하며 아직 백제의 영향이 미치지 않던 이 지역으로 하여금 백제 왕조에게 협력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538년경부터 이들 전방후원분이 사라진 점은 이 두 설명과 잘 어울린다. 
셋째는 왜군의 주둔이 훗날의 신라 청해진과 같은 역활을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양항해가 어려웠던 당시에는 한반도의 서남쪽 모퉁이가 왜(倭)와 대륙을 연결하는 해로에서 빠질 수 없었고 왜(倭)는 이 해로를 보호하는 한편 이 지역을 중계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병력을 주둔시켰다는 것이다.
넷째는 영산강 유역이 청동기 시대부터 구주 지역과 종족적 문화적 연결성이 강했고 전방후원분은 그 결과라는 설명이다. 전방후원분 외에도 독널 무덤이라든가 인골의 특성 같은 고고학적 양상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한편, 앞서 391년 왜(倭)가 한반도에 진출할 때 협력의 대가로 침미다례를 백제에게 주었는데, 이후에도 왜(倭)가 백제에게 땅을 떼어주며 힘을 실어주는 기록은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주었던 땅을 도로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397-03(<-27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 및 현남·지침·곡나·동한(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405(<-28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甘羅城·高難城·爾林城)이다.
477-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했음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구마나리는 오늘날의 공주다. 따라서 이 시기 왜(倭)의 영역은 명목상으로나마 금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미다례는 오늘날의 제주인데 397년에 백제에게서 빼앗았지만 476년에 백제에 조공을 바치고 관직을 받아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구마나리를 줄 즈음에 침미다례도 같이 준 것으로 추정된다. 
또 왜(倭)는 임나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발생하면 나서서 이를 정리해 주었다.

<4현 분쟁>
512-1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치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청했다. 
치리국수 수적신압산이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는) 아침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주어서 나라를 합치더라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태로울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곳이 된다면 몇 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 아뢰었다. 대반대련 금촌이 이 말을 다 듣고 같은 계책을 아뢰었다. 이에 물부대련 추록화를 칙을 선포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물부대련이 난파관을 향해 출발하여 백제객에게 칙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그의 처가 진실로 간하기를 “주길대신이 처음에 바다 밖의 금은의 나라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을 태중의 예전천황에게 주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후 식장족희존과 대신 무내숙니가 나라마다 처음으로 관가를 두어 바다 밖의 번병으로 삼았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고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만약 떼어서 다른 곳에 주면 본래의 구역을 어기게 되니 길이 이어질 비난이 어찌 입에서 떠나겠습니까?”라 하였다. 대련이 응답하기를 “가르쳐 준 것이 이치에 맞으나 천칙을 거스를까 두렵다.”라 하였다. 그 처가 간절하게 “병이라고 핑계대고 선포하지 마십시오.”라 하자 대련이 이를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제지를 붙여서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대형황자가 전에 다른 일이 있어서 나라를 내려주는 데 관여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칙을 선포한 것을 알고 놀라서 뉘우치며 고치고자 하였다. 령을 내려 “태중의 천황 때부터 관가를 두었던 나라를 경솔하게 번국의 요청에 따라 갑자기 줄 수 있느냐?”라 하였다. 이에 일응길사를 보내어 백제객에게 칙을 바꾸어 선포했다. 
사자가 답하여 아뢰기를 “아버지 천황이 편의를 도모하여 칙으로써 주는 것을 이미 마쳤습니다. 아들인 황자가 어찌 천황의 칙을 어기고 함부로 고쳐서 명령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이는 가짜일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진짜일지라도 큰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과 작은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프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파기했다. 이 때 혹 떠도는 말로 “대반대련과 치리국수 수적신압산이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이 4현은 이전부터 이미 실질적인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95년 동성왕이 제(南齊)에 보낸 국서에는 공훈이 있는 장수에게 벽중왕(辟中王)이라는 작위를 요청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벽중은 391년 왜(倭)에 복속한 김제 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498년에는 동성왕이 탐라를 치기 위해 영산강 유역의 무진주(광주)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한반도 서남부가 이 당시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나4현은 웅진과 벽중 사이에 있으니 당연히 이곳도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12년의 기록은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역이있던 임나4현을 공식적으로 백제의 영토라고 인정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나4현이 이런 조치에 저항한 흔적이 없는 것도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 4현 분쟁은 신라가 왜(倭)에 불만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540년 천황이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신하들이 이 4현 분쟁을 거론하며 신라의 불만이 커서 적은 군사로는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내 놓았다.

<기문 분쟁>
513년 백제는 문귀장군 등을 왜(倭)에 보내 오경박사를 바치며 반파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하였다. 몇 달 후에는 반파국도 왜(倭)에 진기한 보물을 바치며 기문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왜(倭)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백제, 신라, 안라 그리고 반파의 신하들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체사(滯沙)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크게 반발한 반파는 이듬해 성을 쌓고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며 왜(倭)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신라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515년 문귀장군이 돌아갈 때 왜(倭)는 물부련을 딸려 보냈다. 물부련은 500명의 수병을 이끌고 대사강(帶沙江)으로 나아갔으며 백제의 문귀장군도 신라로부터 갔다. 그러나 물부련은 대사(帶沙)에서 반파의 군사들에게 크게 패해 겨우 섬으로 도망가 머물렀다. 516년 백제가 사람을 보내 기문에서 물부련을 맞이하고 백제로 데리고 와서 극진히 대접하였다. 물부련이 귀국할 때에는 사신을 딸려 보내 기문의 땅을 내려준 데 대해 사례하고 오경박사도 교체해 주었다.

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와 반파(伴跛)가 모두 나온다. 그러나 두 나라가 한 사건에 동시에 등장한 적은 없다. 그래서 가라와 반파는 별개의 나라가 아닐 가능성이 생긴다. 가라는 임나 초기부터 말기까지 자주 등장하는데 반파는 기문분쟁과 관련하여 6차례 나올 뿐 그 이외의 시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여러 기록을 편집하여 만들었는데 기문분쟁과 관련한 백제의 기록에서는 백제가 자신과 대립한 가라를 반파로 낮춰 표기한 것이 아닐까? 반파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를 제외하면 양(梁)의 직공도가 유일하다. 그런데 이것도 백제 사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위의 추정에 더욱 심증이 가게 한다. 그렇지 않고는 혼자서 백제, 왜 그리고 신라와 맞섰던 강한 나라가 기문분쟁이 일어난 짧은 기간 이외의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기문 분쟁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왜(倭)는 백제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는 가라가 백제로부터 기문을 빼앗았다고 적고 있지만 가라가 나라의 생존을 걸고 저항했던 것으로 보아 억울한 점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또 이후의 영토분쟁을 살펴보아도 왜(倭)는 일관되게 백제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왜(倭)가 백제 편을 드는 이유는 왜(倭)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대륙의 문화를 백제가 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倭)는 진기한 보물보다 오경박사를 더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또 391년에 공동으로 출병하여 낙동강 서쪽 금강 이남을 차지하고 나눠가질 때부터 백제와 왜(倭)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었다. 일본서기에는 기문 분쟁이 시작되던 513년에 왜(倭)에 머물던 무령왕의 아들 순타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에도 백제와 왜(倭)의 관계는 긴밀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둘째, 임나에 대한 왜(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 이전에는 왜(倭)에 대해 임나의 어떤 나라도 반기를 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는 왜(倭)에 대해 반발하는 나라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왜(倭)의 장악력이 이전에 비해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4현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공정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라는 527년 이전 어느 때인가 임나의 남가라(南加羅)와 녹기탄(㖨己呑)을 멸망시켰다. 541년 백제의 성왕은 이 사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녹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임나재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작은 나라 두 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임나의 핵심적 구성요소가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왜(倭)는 임나재건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친다.

<근강모야신의 실패>
527년 왜(倭)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축자는 오늘날의 구주 북부에 있던 나라로 일본 열도의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529년 왜(倭)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모야신은 안라에 큰 당을 세워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불러 칙을 전했다. 임나왕 아리사등이 왜(倭)에 와서 신라의 침략을 호소하자 그를 돌려보내는 길에 모야신에게 분쟁의 해결을 재차 촉구하였다. 이에 모야신은 칙을 내리기 위해 신라와 백제의 왕들을 불렀으나 둘 다 오지 않고 신하만 보내왔다. 모야신이 그들을 돌려보내며 다시 왕들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라가 이질부례지간기를 보내며 3천 명의 군사를 딸려 보냈다. 웅천에 있던 모야신은 군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질부례지간기가 석 달을 기다려도 모야신은 칙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모야신의 종자가 신라군을 괴롭히는 일이 발생하자 4개 촌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530년 임나의 사신이 왜(倭)에 와서 모야신의 폭정을 폭로하였다. 왜인과 임나인 사이에 자식문제로 다툼이 많은데 모야신은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끓는 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낸다며 사람들을 데어 죽게 만드는 등 인민들을 괴롭히는 일만 할 뿐 화해시키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천황이 모야신을 불러들였으나 모야신은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아리사등도 모야신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자 신라와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청했다. 백제군은 모야신의 군대를 격파하고 신라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고 한 달을 기다렸으나 모야신이 나오지 않자 돌아가며 길목에 있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임나에서 온 조길사가 다시 모야신의 폭정을 알리자 왜(倭)는 목협자를 보내 모야신을 재차 불렀다. 이번에는 모야신이 소환에 응해 돌아갔으나 가는 도중 대마도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여기서 임나에 대한 왜(倭)의 개입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임나에는 '한기'라고 불리는 여러 왕들이 있었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임나의 여러 나라는 기본적으로 여느 왕국과 다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왜(倭)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임나의 여러 나라와 주변의 왕국 사이에서 질서를 주도하였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와 왜(倭)는 바다로 갈라져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임나 지역에 왜인이 상주하는 기관을 둘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왜군을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임나재건을 위해 파견된 모야신은 큰 착각을 했던 듯하다. 당시에는 왜왕의 명령을 듣기 위해 왕이 직접 임나로 달려올 만큼 신라와 백제가 왜(倭)에 종속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임나에 거주하는 왜인과 임나인 사이의 분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등 내치에도 매우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급기야 왜(倭)에 신라의 침략을 호소했던 임나가 이번에는 모야신의 폭정을 호소하게 되었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자 오히려 신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모야신의 실패는 왜(倭)가 임나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구에 대해 회의를 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왜의 편향적인 태도는 임나의 일부가 왜(倭)에서 이탈하여 신라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사진 분쟁>
529-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왕이 하치리국수 수적압산신에게 이르기를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다사진(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이 달 물부이세연 부근과 길사로 등을 보내어 진(津)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이에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르기를 “이 진은 관가를 둔 이래로 신이 조공하는 나루터였습니다. 어찌 갑자기 바꾸어서 이웃나라에 줄 수 있으며 처음에 봉해 주었던 것을 어길 수 있습니까?”라 하였다. 칙사 부근 등이 이 때문에 바로 줄 수 없어서 대도로 되돌아 왔다가 따로 녹사를 보내어 결국 부여(백제)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자 가라가 신라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 왕녀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人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종자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현에 나누어 두고 신라 의관을 착용하게 했다. 아리사등이 복장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가게 했다. 신라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을 바꾸어 왕녀를 되돌아오도록 하려고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가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있으니 버리고 어찌 가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신라는) 마침내 길목의 도가·고파·포나모라(刀伽·古跛·布那牟羅)의 3성을 쳐부수고 또 북쪽 경계의 5성을 쳐부수었다.
529 이후 (<522-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529 이후 (<524-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일본서기(720)의 가라(加羅)는 삼국지(289)의 구야(狗邪), 삼국사기(1145)의 가야(加耶) 및 가량(加良)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가 비슷해서 이렇게 한번 묶어 보았다.
‘가라에는 왜(倭)로 건너가기에 좋은 다사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백제가 이 진을 탐내자 왜(倭)가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반발한 가라는 신라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까지 하였다. 신라는 이것을 기회로 가라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였다.’
537년에 편찬된 남제서에는 479년 가라가 제(齊)나라에 조공을 해 오자 가라왕 하지(荷知)에게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가라는 이전부터 이미 왜(倭)의 영향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사진 분쟁에서도 가라는 백제와 왜(倭)의 공조에 맞서 신라의 힘을 이용하여 균형을 맞추려 하였다. 이렇게 임나에서 왜(倭)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틈을 비집고 신라는 이 지역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다.
한편, 임나에 설치한 기구를 통해 이루어지던 왜(倭)의 간섭은 이후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모야신의 실패로 임나에 설치한 통치기구에 대해 회의가 들었으며 둘째, 백제 편향으로 인해 임나의 왜(倭)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갔으며 셋째, 백제가 다사진을 확보하여 사신교환의 용이한 통로가 확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는 왜(倭)를 이용하여 임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임나는 나름대로 신라 및 고려를 이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임나를 장악한 백제는 고려 및 신라와의 전쟁에 임나를 동원하였다.

0526-539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叛波)·탁(卓)·다라(多羅)·전라(前羅)·사라(斯羅)·지미(止迷)·마련(麻連)·상기문(上己文)·하탐라(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 없었다. 521년에 처음으로 백제 사신을 따라와서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0541-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0541-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라고 말하였다.
054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중부 호덕 보제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나라의 재화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0548-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백제) 고구려왕 평성(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0548-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중부간솔 약엽례 등을 보내어 "마진성(馬津城)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라고 아뢰었다.
055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한편, 백제와의 경쟁에서 뒤진 신라와 남북으로 백제 및 돌궐의 침공을 받던 고려가 552년에 한편이 되었다.

055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 가라 그리고 안라가 중부 덕솔 목례금돈,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055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055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0553-1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의 환호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관산성 결전이 벌어졌다.



<관산성 결전>
554년 백제 성왕은 고려와 신라가 힘을 합쳐 백제와 임나를 멸망시키려 한다며 거듭 왜(倭)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왜(倭)의 지원군이 오자 왕자 여창은 가라의 지원군까지 합쳐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에 있던 김무력의 군대까지 끌어와 이에 대응하였다. 그런데 이때 성왕이 여창을 격려하러 가다가 신라군에 포위되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어 백제 연합군은 크게 패하고 여창은 파병온 축자국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관산성 결전은 임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임나멸망>
562년 신라는 임나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에 격분한 왜(倭)는 대장군 기남마려숙녜와 부장군 하변신 경부를 보내어 각각 치리와 거증산으로부터 출동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도 군사를 모아 대응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에 기남마려숙녜는 백제로 돌아갔으나 하변신 경부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성들을 함락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한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신라군에 패하고 따라간 부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 해에 단지 이사부를 보내어 가야를 토벌했다고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전투에서 어린 사다함이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어쨋든 이때부터 삼국사기에서도 가야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임나멸망은 왜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0562-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조를 내려 “신라는 서쪽의 오랑캐로 작고 보잘것 없는 나라이다. 하늘을 거스리고 예의가 없어 우리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고 나의 관가를 깨뜨렸으며 나의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나의 군현을 멸망시켰다. ... 쓸개를 마시고 창자를 꺼내어 함께 간악한 역적을 죽여 천지의 큰 아픔을 씻고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도 신하와 아들의 도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다."
0571-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판전이자랑군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0571-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이로써 왜(倭)는 391년부터 562년까지 170여 년 동안 운영하던 한반도 남부의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임나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
구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독널무덤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발달하였고 일본 전역에서 많이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된다. 무덤방 벽을 붉게 칠한다든가 돌방 안에 돌널을 넣는 것 등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는 무덤양식까지 포함하면 왜계 무덤의 분포는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영역과 비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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