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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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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2)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II)
이태엽 at 2011-01-27 17:26
URL http://kallery.net/s.php?i=426


홍숙호


국조가 된 기자와 단군

요동에서 기자를 인식하였다는 기록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0945 구당서(舊唐書)

其俗多淫祀 事靈星神 日神 可汗神 箕子神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아 영성신, 일신, 가한신 그리고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

 

1060 신당서(新唐書)

俗多淫祠 禮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많아 영성 및 해, 기자(箕子) 그리고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는 사건은 BC 1046년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자를 숭배했다는 고려의 풍속은 구당서와 신당서 이전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고려는 원래 부여 계통을 표방하였고 건국 설화도 부여의 동명 설화를 모방한 주몽 설화다. 

이 주몽 설화는 내용 상 기자 숭배와 병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고려의 풍속에는 원래 기자 숭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을 거쳐 낙랑이 되었고 그 낙랑은 313년에 고려에 흡수되었다가 427년부터 고려의 도읍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즈음부터 낙랑의 기자 숭배가 고려의 풍속으로 흡수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되면, 신라는 박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냈고 백제는 동명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고려, 백제 그리고 신라 모두가 기자조선과 무관한 셈이다.

왕씨고려는 신라와 차별되는 독자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계승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국조의 자리는 신라의 박혁거세에서 고려의 동명으로 바뀌었다. 왕고는 더 나아가 고려의 기자 숭배까지 이어받았다. 이는 중원의 왕조에게 왕고와 중원과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왕조에게는 중원의 권위에 기대어 왕조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평양시 기림리에 기자릉이 축조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래는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들이다.


0933년 (후당으로부터 받은 조서의 일부)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왕건은) 주몽의 계토지정을 따라 군장이 되었고 기자(箕子)의 작번지적을 밟아 사랑과 평화를 펼쳤다.


1011년 加平壤 木覓橋淵道知巖東明王等神勳號.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東明王)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1055년 (거란이 압록강 부근에 전투용 방책을 설치하자 이에 항의하며 보낸 국서의 일부)

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물려받아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다.


1072 (송나라로부터 받은 칙서의 일부) 

箕子啓封 肇於遼左 僧伽演敎 追在泗濱

원래 기자(箕子)는 요동에 봉토를 받아 나라를 열었고 승가는 사수가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1102년 禮部奏 我國敎化禮義 自箕子始 而不載祀典 乞求其墳塋 立祠以祭 從之

예부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에 교화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는 빠졌사오니 무덤을 찾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1199 (금나라로부터 받은 조서의 일부)

粤箕子之故區 寔卞韓之舊壤 根本固而所庇者久 枝葉茂而其承者蕃

옛날 기자(箕子)가 다스린 지역이며 옛 변한의 땅인 고려는 근본이 튼튼한 까닭에 오래토록 잘 보호되어 왔으며, 왕족이 번성한 까닭에 대대로 왕업이 이어져왔다.


1373 (왕고의 관원들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들은 교시의 일부) 

我是一个農家 與我中原作主 恁是 箕子之國新羅樂浪郡相敵 擄了平百姓 如今恁便都做了恁的奴婢

나는 일개 농민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대는 기자(箕子)의 나라, 신라, 낙랑군에 비견될 수 있으며 그들이 지배했던 백성들은 지금 모두 그대의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기자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왕고의 인식은 계속 이어져 훗날 이성계가 세운 왕조의 국호에도 반영되었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아래는 이에 대해 이성계가 올린 표문의 일부다.


1393 조선왕조실록 

竊惟昔在箕子之世 已有朝鮮之稱 玆用奏陳 敢干聰聽 兪音卽降 異渥尤偏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이조시대에는 성리학이 지배적인 사상이 되면서 기자에 관한 서적도 많이 저술되었다. 기자지(1580 윤두수), 기자실기(1580 이율곡), 기자유제설(1640 한백겸), 기자외기(1776 서명응), 기전고(1790 이가환/이의준) 등이 그 예이다. 일조시대에 들어와서는 1929년에 대동사강이 편찬되고 1932년에는 태원선우씨세보가 편찬되어 기자조선의 역대 왕 계보와 치세기간을 자세히 기록해 놓기도 했다. 현재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성씨로는 태원선우씨, 행주기씨 그리고 청주한씨가 있다.

이러한 기자조선은 이조말까지만 해도 사서간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라든가 어떤 계통을 거쳐 고대국가로 이어졌는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을 뿐 존재 그 자체가 의심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조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몇몇 일본학자들에 의해 기자조선의 존재자체가 부정되거나 기자조선과 한민족과의 관련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이후 현재까지는 한국과 김씨조선 학자들 대부분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자조선의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조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기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8조법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고 있어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로까지 끌어올리면서 단군신화에 기자가 언급되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 조선은 한민족의 뿌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 조선이 갑자기 한민족의 뿌리로 둔갑하게 된 것은 바로 기자 때문이다. 중국의 유교 문화가 권위를 가지던 시기에 왕조를 세운 세력들이 기자의 명성에 기대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 때문에 조선이 한민족의 뿌리로 채택되었지만 기자는 훗날 등장한 단군에게 그 조선의 시조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다.

단군에 관련된 기록은 기자에 비해 매우 늦게 등장하는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것은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다.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247년)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1281년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소개되어 있다.


1281 삼국유사(三國遺事)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였다.(經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한 백악이라고도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했으니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천, 부, 인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라 하고 자신은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풍백, 우사 그리고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인명, 질병, 형벌,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가르쳤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기도하며 사람으로 변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곰은 그것을 먹으며 조심한지 37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했는데 호랑이는 그러지 못해 사람의 몸으로 변할 수 없었다.
웅녀는 결혼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번 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당(唐)의 요(堯)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에 (당의 요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이므로 50년은 정사지 경인이 아니다. 사실인지 의심스럽다.)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혹은 방이라고 한다.) 홀산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다.”라고 하였다.
(현재 전하는 魏書에는 위에서 인용한 내용이 없다. 堯가 다스린 唐은 황하 중류의 襄汾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는 서기전 2500년에서 서기전 1900년 사이의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고 있다. 周 武王은 서기전 1046년에 商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기자가 풀려났다.)


기자조선 앞에 단군조선이 덧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1287년에 편찬된 제왕운기에도 본기를 인용한 단군신화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와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본기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었다. 환인이 환웅에게 말하기를 '지상의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을 크게 이롭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환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 왔으니 이 분을 단웅천왕이라 한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이라 했다. 조선의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그리고 맥은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시대였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죽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단군신화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대체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표준으로 여긴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도 요긴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신라, 고려 그리고 부여를 조선과 연결시켜주는 부분이다. 기자조선계승과 고려계승을 표방한 왕고로서는 한사군에 의해 단절된 조선과 고려를 연결시켜주는 이야기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여러 기록들을 볼 때, 단군신화는 대동강 유역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기록되면서 비로소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신라나 백제 또는 고려가 단군을 숭배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단군을 국조로 생각하는 의식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편찬된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왕조 차원에서 단군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이씨조선에 들어온 이후다. 1392년부터 기자와 함께 단군을 국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12년부터 평양에 있는 기자 사당에 단군 신위를 함께 모시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425년에는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 기자와 같은 수준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조시대는 성리학이 사회의 지배 사상이었기 때문에 기자가 여전히 단군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단군은 무속인들 사이에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다 이조말기부터 민족주의 풍조가 크게 일면서 민족의 고유성이 높이 평가되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끄럽게 평가되는 분위기가 일자 기자보다 단군이 추켜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의 한국과 김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한국에서는 먼저 개천절과 단기사용을 통해 단군이 숭배되었다. 개천절은 원래 단군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던 대종교에서 행하던 행사였는데 대한민국에서 이를 개국기념일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단기는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서기전 2333년을 원년으로 계산한 것으로 서기 2000년은 단기 4333년이 된다. 이 단기는 1961년까지 사용되다가 이후 서기로 교체되었다.

한국에서 단군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고등학교 국사책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국사책은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풍백, 우사 그리고 운사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렸다는 신화속의 이야기는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로 만들어 내었다.

또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고 그 방법을 일러주었으나 곰만 성공하고 호랑이는 실패했다는 신화속의 이야기는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로 창작해 내었다.

이쯤 되면 역사가 아니라 환상 소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조의 경우 처음에는 단군 이야기를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로 보았다. 당연히 단군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는데 1993년에 단군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나서는 태도가 돌변했다. 거기서 나온 인골의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기전 310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며 단군의 유골이라 주장하고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거대한 사각뿔 형태의 돌무덤을 만들었다. 이렇게 김조가 갑작스레 단군에 대한 입장을 바꾼 이유는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있었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연관이 있다. 공산주의의 실패로 인해 생긴 통치 이념의 손상을 민족주의에 기대어 보완하려 한 것이다.

원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단군묘로 처음 나타난다. 이후 왕조에서 수리를 하고 수호인을 두었는데, 단군릉으로 승격되어 기자릉 및 동명왕릉과 같은 격이 된 것은 1900년의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민족의 국조는 박혁거세, 동명, 기자 그리고 단군의 순서로 변해왔다. 그 각 과정에는 왕씨고려의 왕조, 유학자 그리고 민족주의자의 정치적인 계산이 작용하였다. 지금 단군이 국조의 자리에 올라 있지만 그도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위 사진은 평양시 기림리에 있었던 기자릉으로 왕씨고려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래 사진은 평양 인근의 강동군에 있는 단군릉으로 김씨조선이 만들었다. 이 두 릉은 국조가 당대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바뀌어 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군신화 해체

단군신화의 뿌리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추정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왕검전설을 언급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위만조선 건국을 기록한 사기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하나의 가능성이 생긴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이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인데 어떤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王之都王險)고 한다’고 되어 있고 사기에는 ‘위만이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王之都王險)'고 되어 있다. 두 기록에서 '王之都王險'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 점은 왕검전설이 위만조선의 건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남겨준다.

삼국유사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554년에 편찬된 위서(魏書)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고 고기(古記)는 지금 전해 내려오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 왕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전설이 분명히 있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동안 살이 덧붙여지고 내용이 변형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국유사(1281)의 단군왕검도 삼국사기(1145)의 선인왕검과 달라 보이고 제왕운기(1287)와 묘향산지(1630년 이후)의 단군신화도 삼국유사의 그것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곰이 호랑이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후 환웅과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제왕운기에는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변하게 한 후 단수신과 혼인시켜 단군을 낳게 했다고 되어 있다. 묘향산지에는 환웅이 흰 호랑이와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신화가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의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이야기에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더욱이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가지고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경쟁해서 전자가 승리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단군신화로부터 한민족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곰을 숭배하는 풍습은 퉁구스의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고 한민족의 정서는 견훤설화나 왕건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호랑이와 보다 친숙하기 때문이다. 곰과 사람이 혼인하는 이야기는 퉁구스 여러 부족의 설화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단군신화에는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그런데 그 인물들 중에는 다른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많다.

제석(帝釋) 환인(桓因)은 불교경전인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석제환인(釋提桓因)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석제환인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한다. 제왕운기에는 ‘제석환인’대신 ‘상제(上帝)환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상제는 고대 중국의 최고신이다.

풍백과 우사도 중국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산해경에는 황제와 치우가 탁록의 벌판에서 싸울 때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동원하여 크게 비바람을 일으키자 황제가 발(魃)이라는 천녀를 불러 비바람을 그치게 한 후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되어 있다.

운사 또한 춘추좌씨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630년에 편찬된 상촌집에는 요순시대 이전에 하늘에 관한 일을 다루는 용사(龍師), 수사(水師), 화사(火師), 운사(雲師) 그리고 조사(鳥師)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운사는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왕고시대의 이색이 지은 시에 '雲師風伯亦何心(구름 귀신 바람 귀신 또한 무슨 맘이던고)'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주나라의 호왕(무왕)이나 기자는 물론 논어를 비롯한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기전 91년에 편찬된 사기에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고 되어 있다.

요컨대, 단군신화는 여러 가지 역사기록과 설화가 섞여 만들어진 이야기다.




단군의 의미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이야기는 신화일 뿐이다.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에는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신화나 전설이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에 대한 전설이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 전해 내려온다. 주원장은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사람이고 주원장 전설이 채록된 시기는 19세기말이니 전설의 시대배경과 채록사이의 시간간극이 6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주원장이 한반도에서 태어났다는 이러한 전설은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단군신화는 신화의 시대배경과 신화가 채록된 시간 사이에 최소 3000년 이상의 간극이 있다. 여기에 역사적 의미가 얼마나 내포되어 있을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북한산 비봉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는데 1816년 김정희가 비문을 해독해 본 결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밝혀졌다. 그전까지는 무학대사의 전설과 연관된 비석이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1392년 이씨조선을 세운 이성계를 도운 사람이니 고작 500년도 채 되지 않은 옛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만약 비석의 비문이 다 닳고 없어졌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무학대사의 전설에 얽힌 비석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문자기록에 비해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매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문자사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굉장히 오랜 기간 구전되어 왔을 것이다. 이 점에서 또한 단군신화가 역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일단 단군신화를 역사로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한국사는 점점 역사가 아닌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 종교 그리고 상업적 목적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계속 확대시켜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와 같은 유사역사학이 번성하게 된 큰 원인은 바로 단군신화와 한국사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군신화가 기록되던 왕씨고려의 후반기는 매우 참혹한 시기였다. 1231년부터 몽골이 침략해오기 시작했는데 왕씨고려의 조정은 강화도로 도망하여 숨어 버리는 바람에 몽골군은 이후 30여 년 간 전국을 유린하며 약탈을 자행하였다. 1270년 마침내 왕씨고려의 조정이 몽골에 항복하고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옮겨오게 되는데 이후 100여 년 간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단군신화가 수록된 삼국유사가 씌어 질 무렵은 몽골의 2차 일본원정에 왕씨고려인들이 동원되던 1281년경이었다. 그리고 1287년경에는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도 단군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이 사라진 지 거의 1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단군신화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참혹하게 짓밟힌 한민족의 자존심을 ‘우리는 원래 중국과 비교될 정도의 오랜 역사를 지닌 하늘의 자손이었다.’고 하는 신화를 통하여 위로받으려 했을 것이다. 이 단군신화는 이씨조선말기와 일제시대에 걸쳐서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큰 정신적 힘이 되었다. 또 해방이후 일제식민잔재를 극복하고 민족국가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용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더 이상 외세의 억압을 받는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이제 사람들의 인지가 발달해서 신비한 이야기를 통해서 정신적인 힘을 얻던 시대도 지났다. 이제 단군은 옛날 조선족에 내려오던 신화 속의 인물로 돌려보내고 단군이 하던 역할은 합리적인 공동체의식에 그 임무를 넘겨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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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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