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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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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신라민족론] (3)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II)
이태엽 at 2010-11-22 09:17
URL http://kallery.net/s.php?i=417

왜(倭)의 한반도 진출
신라와 대립관계에 있던 왜(倭)는 백제를 만나게 되면서 한반도로 진출하게 된다. 왜(倭)가 백제를 만나는 과정은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66(<-246) 일본서기 신공황후 46년, 봄 3월 을해 초하루 이마숙니를 탁순국에 보내었다. [이마숙니는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탁순국왕 말금한기가 이마숙니에게 “갑자년 7월에 백제인 구저‧미주류‧막고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군왕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구저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구저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오.’라고 하고는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이마숙니는 종자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肖古王)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 가지 빛깔의 채색비단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 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런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자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이파이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지마숙니에게 보고했다. 바로 탁순으로부터 돌아왔다.

366년 ‘탁순국의 중개로 백제와 왜(倭)가 외교관계를 텄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탁순국은 임나의 한 소국이다.
이후 백제와 왜(倭)는 여러 차례 사신과 선물을 교환하는데 칠지도도 그 중의 하나였다.

372(<-252)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 가을 9월 초하루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근초고왕)이 올리는 글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다. 그래서 천은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산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고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이 칠지도에 새겨진 문구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칠지도가 백제와 왜(倭) 사이에서 가지는 의미는 당시의 정황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당시 백제는 369년부터 시작해서 거의 매년 고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는 고려를 제외한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왜(倭) 외에도 백제가 신라와 진(晉)나라에 선물을 주며 우호관계를 다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해주는 사례들이다.

366 삼국사기 백제 근초고왕 21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368 삼국사기 백제 근초고왕 23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372 삼국사기 백제 근초고왕 27년, 정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기록에는 백제가 왜(倭)나 진나라에 조공을 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당시 왜(倭)나 진나라가 백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라에 말 두 필을 보낸 것처럼 그냥 외교적 선물이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그런데 391년이 되면서 왜(倭)가 한반도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391 광개토왕릉비 
백잔, 신라는 예로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 신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391-03(<-249-03)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49년 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탄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목라근자 등이 의류촌(지금은 주류수기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 년 만 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만 기록할 뿐 낙랑이나 임나에 대해서는 삼국의 눈에 비친 단편적인 모습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임나의 내부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다고 없었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의 기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완전히 없었던 일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가지고 연대를 옮기고 내용을 변형한 다음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있었던 인물들을 갖다 붙여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도 연대, 사건 그리고 인물을 모두 해체한 다음 다른 사료와 대조해 가며 재구성해야 한다.
먼저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내용상 가장 근접한 기록을 찾아보면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1년의 기록이다. 두 기록은 모두 왜(倭)가 우위에 서서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고 하는 점에서 줄거리가 같다.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은 391년에 있었던 사건을 옮겨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두 기록에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왜(倭)와 백제의 관계에 있어서 광개토왕릉비는 왜(倭)가 백제를 정복했다고 하는데 반해 일본서기는 왜(倭)가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백제와 왜(倭)가 군사적으로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아무데도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이 사건에 이어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백제가 왜(倭)에 정복당했다고 하기 보다 왜(倭)와 동맹을 맺었다고 해야 더 잘 어울린다. 광개토왕릉비는 기본적으로 백제를 비하하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백제가 왜(倭)에 협력한 것을 정복당한 것으로 왜곡했다면 그 동기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정황에 들어맞는다.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신공황후 편의 다른 기록들처럼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이전이나 이후에 있었던 인물들을 끌어다 붙여놓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을 재구성 해보면, ‘391년 왜(倭)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임나 지역을 점령한 뒤 일부는 백제에게 나눠주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해놓고 보면 397년과 402년에 각각 백제와 신라가 왜(倭)에 인질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400년에 왜군이 임나가라를 점령한 상태에서 신라에 침입하였다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백제가 왜(倭)와 함께 한반도 남부를 경략하는 틈을 타서 말갈과 고려가 백제의 북쪽을 침략해 왔다.

391-04 삼국사기 백제 진사왕 7년,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391-07 삼국사기 고려 광개토왕 0년,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391-10 삼국사기 고려 광개토왕 0년,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특히 고려의 침략은 백제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쳤는지 진사왕은 얼마안가 죽고 만다.

392-11 삼국사기 백제 진사왕 8년, 왕이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392(<-272) 일본서기 응신천황 3년,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菟木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아화(阿花 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는 진사왕에서 아신왕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에 왜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와는 다른 내용인데 일본서기는 진사왕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침류왕에서 진사왕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에서도 삼국사기는 침류왕이 죽자 아들이 너무 어려서 삼촌이던 진사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서기는 진사왕이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고려에 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려에 쳐들어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392-08 삼국사기 고려 광개토왕 2년,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393-07 삼국사기 고려 광개토왕 3년,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393-08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2년, 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94-07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3년,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394-08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3년,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395-11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4년,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한 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396 광개토왕릉비, 태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태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태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398-08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7년,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정벌을 곧 중지하였다.

이러한 패전은 단순히 패전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위기에 몰린 백제는 왜(倭)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기댈 수밖에 없었다. 

397-03(<-277) 일본서기 응신천황 8년,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倭)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397-05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 6년,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399 광개토왕릉비,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한편, 백제와 왜(倭)의 연대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고려에 기대게 된다.

392-01 삼국사기 나물 이사금 37년,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399 광개토왕릉비, 태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400 광개토왕릉비, 태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벌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렇게 신라가 고려에 기댄 결과로 고려는 신라의 왕위계승문제에도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401-07 삼국사기 나물 이사금 46년,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402-02 삼국사기 나물 이사금 47년, 나물이 죽고 그 아들이 어려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402-03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01년, 왜국과 강화하였는데, 왜왕은 나물 이사금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일찍이 나물 이사금이 자기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의 아들에게 감정을 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보냈다.
412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11년, 나물 이사금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17-05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16년, 눌지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나물 이사금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삼았으므로,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나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그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 했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 몰래 말하기를 “눌지를 보면 곧 죽이시오.”라고 했다. 마침내 눌지로 하여금 가게 하여 도중에 맞도록 했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와 정신이 시원스럽고 우아해 군자의 풍채가 있으므로 마침내 “그대 나라의 왕이 나를 시켜 당신을 해치도록 했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치지 못하겠다.”고 하고 이내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해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418 삼국사기 눌지 마립간 2년, 가을에 왕의 동생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돌아왔다.

여기서는 또 신라가 왜(倭)에 보낸 인질이 정쟁의 희생양일 뿐 실질적인 인질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 점은 인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왜(倭)가 지속적으로 침략해 왔다거나 박제상을 보내어 인질을 구출해 온 사실로 뒷받침이 된다.

대체로 391년 왜(倭)의 한반도 진출로 시작된 혼전은 404년 왜(倭)와 고려 사이의 전투를 끝으로 일단 정리가 된다.
그 정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392년부터 신라가 고려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
391년 왜(倭)가 백제와 연대하여 한반도에 진출하자 신라는 392년 고려에 인질을 보내어 기대게 된다.
(2) 392년 또는 397년부터 백제가 왜(倭)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
391년 이후 고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한 백제는 왜(倭)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사왕에서 아신왕으로 교체되는 392년부터이고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태자 전지를 왜(倭)에 인질로 보낸 397년부터가 된다. 이후 백제와 왜(倭)의 친밀한 관계는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 398년 이후 삼국 간의 전쟁이 거의 사라졌다.
398년 백제는 고려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475년까지 큰 전쟁이 없었다.
(4) 400년부터 고려는 연나라와 분쟁을 시작했다.
고려는 연나라(前燕)가 쇠약해지자 369년부터 백제와의 다툼에 몰두해 왔으나 384년 연나라(後燕)가 재건되고 백제의 공세가 멈추자 400년부터 다시 연나라와 다투기 시작했다.
(5) 405년부터 왜(倭)는 신라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300년 이후 왜(倭)가 신라를 침략하는 일은 매우 뜸했었다. 그러나 391년 이후 특히 405년부터는 침략이 급증하였다.




397년 왜(倭)에 태자를 인질로 보냈던 백제는 왜(倭)와의 우호관계를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두 나라의 관계는 완전히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 점은 405년 아신왕이 죽고 전지가 왕이 되는 과정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4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서는 영(映)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이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405(<-28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이 해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왜(倭)가 백제의 왕위계승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백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왕에게 변고가 생겼을 때 왜왕이 왜(倭)에 머물던 백제의 왕자를 군사를 딸려보내 백제왕으로 오르게 하는 일은 이후 477년과 661년에도 있었다.
백제가 왜(倭)에 인질을 보낸 기록은 백제가 패망할 때에도 나타난다.
 
631-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豐章)을 들여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승려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전지 및 부여풍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지 이후부터 부여풍 이전까지의 기간에서는 두 사서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개로왕에서 무령왕에 이르는 시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는 이 시기의 왕위계승이 개로왕(455-475) - 문주왕(475-477) - 삼근왕(477-479) - 동성왕(479-501) - 무령왕(501-523)으로 이어진다고 하고 부자관계는 개로왕-문주왕-삼근왕으로 이어지는 갈래와 개로왕-곤지-동성왕-무령왕으로 이어지는 갈래가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일본서기에는 문주왕과 곤지가 모두 개로왕의 동생이며 동성왕과 무령왕은 모두 곤지의 아들이고 무령왕의 친부는 개로왕이라고 하였다.
이 부분의 일본서기 기록은 아래와 같다.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458-07 백제의 지진원은 천황이 장차 동침하려는 것을 거스르고 석천순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에게 명하여 내목부를 시켜 부부의 사지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
461-04 백제 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군군(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다다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461-06 임신한 부인이 과연 개로왕의 말처럼 축자의 각라도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였다. 이에 군군은 곧 한 척의 배로 도군을 본국에 보내었는데, 이가 무령왕이 되었다.
461-07 군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백제신찬에 “신축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보내어 대왜(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 형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476 겨울 고려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창하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고려의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 된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
477-03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479-04 백제의 문근왕(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
502 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제거하고 도왕(嶋王)을 세우니 바로 무령왕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믿을만한지는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이 갈라놓았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무령왕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가 40세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개로왕 8년인 462년에 출생한 것이 된다. 이것을 삼국사기의 계통에 적용하면 개로왕은 증손자인 무령왕을 보고도 13년을 더 왕으로 재직한 셈이 된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훨씬 자연스럽고 또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일본서기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458년 이전에는 백제가 왜(倭)에 채녀를 보냈다.
(2) 461년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왜(倭)에 인질로 보냈다.
(3) 477년 왜(倭)는 백제가 재건할 수 있도록 임나의 일부 영토를 떼어 주었다.
(4) 479년 백제왕이 죽자 왜(倭)는 곤지의 아들 말다왕을 보내어 백제왕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하나 살펴보면 개연성은 모두 가지고 있다.
(1)은 고대 국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472 위서(魏書 636), (백제 개로왕이 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631-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가) 당(唐)에 사신을 보내서 미녀 두 사람을 바쳤는데, 위징이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저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오히려 추위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그 나라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두 여자는 멀리 친척과 이별함에 있어서랴!”고 하였다. 사신에게 딸려서 돌려보냈다.
646-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고려) 왕과 막리지 개금(연개소문)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기를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지만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이 불쌍해서 나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722-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 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미녀 2명을 바쳤다. 한 명은 이름이 포정이며 아버지는 나마 천승이었고, 또 한 명은 이름이 정완이며 아버지는 대사 충훈이었다.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와 자태를 갖추게 하여 보내었다.
791-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가) 당에 사신을 파견해 미녀 김정란을 바쳤다. 그 여인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몸에서 향기가 났다.

(2)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비추어 보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397년에 백제가 태자 전지를 왜(倭)에 볼모로 보냈다고 되어 있고 661년의 기록에도 왕자 부여풍이 왜(倭)에 인질로 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과 (4)는 비슷한 사례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바로 405년 백제 아신왕이 죽었을 때 볼모로 왜(倭)에 가 있던 전지가 돌아와 왕이 되었다는 기록인데, 삼국사기에는 왜왕이 무사 100명을 붙여 호위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천황이 동한의 땅을 전지에게 주어 보냈다고 되어 있다.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특히 475년 고려의 침략을 받아 도읍이 함락당하고 왕까지 살해당한 백제는 거의 망한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일본서기가 말하는 것처럼 왜(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후 백제는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551년에는 신라와 함께 한강 하류지역을 회복하였다.
 
551-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고려) 돌궐이 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옮겨서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을 보내 병력 1만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55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 왕이 거칠부 및 대각찬 구진 등 여덟 장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55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552 북사(北史 659), 문제는 영주에 이르러 박릉 최유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위나라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면서, ... 고려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양원왕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뜨렸다. 왕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를 돌려받아 복명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신라가 백제와의 협력관계를 깨고 고려와 협력하는 바람에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552-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와 가라 그리고 안라가 중부 덕솔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5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니미방이다. 
553-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상부의 덕솔 등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553-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내신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동선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칙을 내려 “의박사·역박사·력박사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 복서 및 역본과 여러 가지 약물도 보내라”고 하였다. 
55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553-0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상부의 내솔 등을 보내 표를 올려 “... 올해 문득 들으니 신라가 고려와 함께 모의하여 ... '일본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 하였다고 합니다. ... 천황께서 빨리 전군과 후군을 보내 서로 이어 와서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 천황께서 활과 말을 많이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553-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 왕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로 삼았다. 
553-1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554-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중부의 목리시덕문차, 전부의 시덕 일좌분옥 등을 축자에 보내 내신·좌백련 등에게 묻기를 “...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554-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하부의 간솔 장군 삼귀와 상부의 내솔 물부오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554-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내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나아갔다.
 
위기에 몰린 백제가 계속해서 왜(倭)에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제는 다행히 고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하여 위기에 몰리게 된다.
 
55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백제)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55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 백제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55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백제)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554-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백제)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554-1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가 하부의 간솔 문사간노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 명(明)과 안라에 있는 왜신들, 임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은 아룁니다. 신라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려와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관가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유지신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담요 1령, 도끼 300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 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555-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 왕자 여창이 아우 혜를 보내어 “성명왕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56-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아배신, 좌백련, 파마직을 보내어 축자국의 수군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557-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 왕자 여창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위덕왕이다.
 
백제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왜(倭)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북아의 역학구도 상 백제는 왜(倭)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신라와 고려의 공조에 맞설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이는 신라와 고려가 공조관계에 들어가자마자 힘들여 차지한 한강하류지역을 쉽게 포기하였다거나 군사적 원조를 간청하는 사신을 왜(倭)에 지속적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사실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왕이 전사하고 대군이 궤멸당한 백제를 신라가 완전히 병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점도 백제의 뒤에 있는 왜(倭)의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
성왕이 전사했을 때 맏아들인 여창은 바로 왕위를 잇지 못하고 3년 후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백제 왕가의 국정 장악력이 상당히 약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창은 왜(倭)에 아우를 보내어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한 후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여창이 왕위에 오르는 일에도 왜(倭)의 후광이 상당한 기반이 된 것이다.
이렇게 백제는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왜(倭)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해 왔다. 391년 이후 광개토왕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을 때도 그랬고 475년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고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겼을 때도 그랬다. 554년 신라를 침공했다가 성왕이 전사하고 군대가 궤멸한 위기도 왜(倭)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당(唐)의 협공을 받았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중국대륙이 분열되어 있을 때에는 중국의 어느 나라도 한반도에 깊이 개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려, 백제, 신라 그리고 왜(倭)는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 고려도 왜(倭)를 의식해서 백제를 완전히 병합하지 못했고 성왕을 죽이고 백제군을 궤멸시킨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국대륙에 통일제국이 들어서면서 중국과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과 대신들이 당(唐)에 끌려가자 왜(倭)는 볼모로 와 있던 부여풍을 귀국시켜 백제왕으로 삼게 하고 계속해서 지원군을 보내주는 한편 3년여에 걸쳐 선박과 무기를 만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마침내 663년에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661-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황태자가 장진관에서 직관을 백제 왕자 풍장에게 주고, 또 다신장부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대산하 협정련빈랑, 소산하 진조전래진을 보내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풍장이 나라에 들어갈 때 복신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66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당(唐)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박시전래진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로 도망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유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백강구 전투를 끝으로 300여 년 간이나 지속되었던 백제와 왜(倭)의 친밀한 관계는 끝이 났고 왜(倭)는 한반도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러나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에 의해 백제의 흔적은 오래도록 일본에 남아 있었다.
백제왕족이었던 여자신은 왜로 건너가 다카노 미야스코라는 일본의 유명한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또 백제의 귀족이었던 귀실집사는 400여 명의 백제인을 데리고 왜로 이주하였는데 왜로부터 소금하라는 관품을 받고 학직도라는 유교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왜는 669년 여자신의 추종무리와 귀실집사의 추종무리를 합쳐 약 700여 명의 백제인을 오미노 구니의 가모군에 함께 옮겨 살게 하였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은 일찍부터 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망하자 왜로부터 구다라노 고니기시(백제왕)라는 성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그의 후손 백제왕 경복은 무쓰노구니의 지방관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금을 발견하고 채굴하여 749년 900냥이나 천황에게 진상함으로써 도다이지의 대불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무령왕의 아들 순타의 후손들은 왜에서 야마토노 후이토라는 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 가문의 다카노 니이가사는 고닌천황의 한 부인이 되어 간무천황을 낳게 된다. 일본 천황의 모계혈통에 백제의 피가 섞였다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무천황은 790년 백제왕가문을 외척으로 대우할 것을 특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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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흉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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