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munications∨
 | 
Infos on Art∨
 
Kallery > _others > 
이태엽
 (trustle)
소개 | 작품 | 자료실 | 방명록
309
[신라민족론] (3)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I)
이태엽 at 2010-10-30 14:19
URL http://kallery.net/s.php?i=414

왜인들은 선사시대에 한반도 남단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반도 남단은 일본열도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는데, 특히 391년 왜(倭)는 임나지역을 점령하고 이후 170여 년 간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562년 임나가 신라에 병합되고 660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백제마저 신라에 통합되면서 왜(倭)와 한반도는 거의 단절된 역사의 길을 걷게 된다.




영산 복강 동조현상
한국의 영산 지역과 일본의 복강 지역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고인돌, 큰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렸하다.
고인돌은 한국에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뉘는데, 남방계 고인돌은 한강 이남 전체에 분포하지만 영산 지역에 특히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복강 지역에서만 고인돌이 출토되는데 한국의 남방계와 구조가 같다.
독널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어 왔다. 크기로 볼 때 주로 유아나 성인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에서는 승문시대부터 독널 무덤이 있었으나 미생시대에 와서 복강 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성인을 주로 나무널에 묻다 미생시대 중기부터 독널로 바꾸었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독널 무덤이 많았지만 3세기부터 영산 지역에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대형 독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독널 무덤은 5세기부터 다른 무덤 양식과 공존하다 6세기에 이르러 전방후원분과 함께 사라졌다.
일본의 고분시대는 고분, 특히 전방후원분이 축조되던 시기를 말한다. 3세기 중반에서 7세기 말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미생시대 말기의 고고학적 양상을 보면 복강과 내량 두 지역에서 고대 국가로 발전할 만한 세력이 있었다. 이 중 어느 하나가 대화 왕조를 수립했을 것이다. 전방후원분은 대화 왕조가 열도를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방의 호족들을 흡수하고 허용했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영산 지역에서만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는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축조되었다.
이러한 영산 복강 동조현상은 역사 기록에 그 설명이 없지만 고고학적 양상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사료의 신뢰성
한반도와 왜의 관계를 밝혀주는 주요 사료로는 광개토왕릉비, 일본서기 그리고 삼국사기가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에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용비어천비(碑)’는 고인의 생애를 미화하고 공적을 부풀리지만 과실은 절대 기록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연(燕)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거나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영토를 빼앗겼다거나 하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광개토왕릉비는 사서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록의 전승과정에서 내용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는 사서에 비해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금석문으로서의 장점은 인정된다.
비석뿐만 아니라 사서 또한 지배세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통치세력이 자신들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는 경우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용비어천기(紀)’가 되기 쉽다. 그래서 보통 한 왕조의 역사는 다음 왕조에서 사료를 정리하여 사서로 편찬해 낸다. 고려사는 이씨조선이 편찬하였고 삼국사기는 왕씨고려가 편찬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천황의 명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사서로 편찬하였다. 일본서기가 편찬되던 720년은 일본의 전신인 왜(倭)가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또 당나라와 신라로부터 침략이 있을까 두려워하던 때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일본은 천황가를 미화하고 경쟁국인 신라를 비하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고 일본서기의 편찬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특히 신공황후 집권시기의 기록은 신라를 정벌하자 백제와 고려의 왕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거나, 신라왕을 사로잡아 무릎뼈를 빼고 바위 위를 기게 한 다음 목을 베어 모래 속에 파묻었다거나, 신라의 인질을 탈출시킨 모마리질지를 잡아 불에 태워 죽였다거나, 한반도의 7국과 4읍을 정벌하고 침미다례를 백제에게 주었다거나 하는 등 대단한 사건들이 죄다 모여 있어 신뢰성이 극히 의심된다. 이에 비해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는 자의적으로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물론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보다 400여년 앞서 편찬되었으니 기록이 더 온전하게 남아있을 때 편찬된 점은 인정된다.
삼국사기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초기기록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각각의 기록을 해석하기로 한다.





648년에 편찬된 진서(晉書)에는 광개토왕이 연(燕)나라에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조공은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바치는 것이니 이 기록만 놓고 보면 고려가 연나라에 비해 국력이 약한 나라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시의 정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99 광개토왕 09년, 정월에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400(<-399) 광태토왕 09년, 2월에 연나라 왕 성(盛)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몸소 병력 3만을 거느리고 불의에 쳐들어와 신성과 남소성의 두 성을 쳐서 빼앗고 땅 7백여 리를 넓히고 5천여 호를 옮기어 돌아갔다.
401 광개토왕 11년, 왕이 병력을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니, 연나라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403 광개토왕 13년, 11월에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404 광개토왕 14년, 정월에 연나라 왕 희(熙)가 요동성을 침공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05 광개토왕 15년, 12월에 연나라 왕 희가 거란을 습격했다가 실패하자 우리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한때 고려가 연나라에 조공을 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나라가 대등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417(<-297) 응신천황 28년,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고려왕은 일본국에 교(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태자는 그 표를 읽고 노하여 고려의 사신을 꾸짖었다. 그리고 그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여 파기하였다.
426(<-306) 응신천황 31년, 고려에 도착하였으나 오(吳, 중국 남조)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고려에 구하니, 고려왕은 구례파와 구례지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나라의 왕은 공녀(工女) 4명을 주었다.
444(<-324) 인덕천황 12년, 가을 7월 고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바쳤다.
490(<-370) 인덕천황 58년, 겨울 10월 오국(吳國)과 고려가 함께 조공하였다.

단순한 외교적 선물을 조공으로 표기했다는 것을 대번 알 수 있다. 당시 고려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던 장수왕의 재위기간이었고 중국 남조는 중국대륙의 절반을 통치하던 제국이었기 때문에 외딴 섬나라의 왕에게 조공을 바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사료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당시의 정황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읽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연도를 맞추는 작업이다.
여기서는 신공황후 편에 실려 있는 비교적 명백한 사건을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기록과 대조해서 결정하기로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신공황후 편
신공황후 55년(서기 255년)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죽었다.
신공황후 56년(서기 256년) 백제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
신공황후 64년(서기 264년) 백제국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
신공황후 65년(서기 265년)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백제본기
375년 겨울 11월에 근초고왕이 죽었다. 근구수왕[近仇首王, 수(須)라고도 하였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384년 여름 4월에 근구수왕이 죽었다. 침류왕(枕流王)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阿尒夫人)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85년 겨울 11월에 침류왕이 죽었다. 진사왕(辰斯王)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辰斯)가 왕위에 올랐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의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과 정확히 120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연도에 맞추면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의 정황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연도를 기준으로 하고 신공황후 편의 기록을 모두 120년 뒤로 물리기로 한다. 이것을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이라고 부른다.
이런 오차가 생기는 이유는 지금과 같이 서기를 쓰지 않고 갑자년, 을축년, 병인년, ... 등과 같이 10간과 12지를 조합하여 연도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도를 표시하면 60년마다 같은 명칭이 반복되므로 사료에 기록된 연도를 해독할 때 60의 배수만큼 착오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에서 신라, 백제 그리고 왜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년)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 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백잔, 신라는 옛날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 신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戌兵新▨▨▨▨其▨▨▨▨▨▨▨言」
▨▨▨▨▨▨▨▨▨▨▨▨▨▨▨▨▨▨▨▨▨▨▨▨▨▨辭▨▨▨▨▨▨▨▨▨▨▨▨▨潰」
▨▨▨▨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399년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벌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하여 조공하였다. 404년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었다.
(2)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3) 396년 고려가 백제를 토벌하였다.
(4) 399년 백제가 왜와 연대하였고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5) 400년 왜군이 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신라성에 침입한 상태였다.
(6) 400년 고려가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쫓아 임나가라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7) 400년 이후 신라가 고려에 조공을 바쳤다.
(8) 404년 왜가 대방에 침입하였으나 고려가 격퇴하였다.

여기서 (2)는 원래 글자가 마모된 부분이 있었는데 앞뒤의 문맥과 남아있는 자구로 그 의미를 유추해 낸 것이다. (1)에서 백제는 원래 고려의 속국이었는데 (2)의 일이 있은 후에 (3)에서 고려가 백제를 토벌하였다고 하므로 (2)는 (1)과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야 하고 (3)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나’, ‘왜’, ‘391년에’, ‘바다를 건너다‘, ’백제를 격파하다‘, ’신라‘ 그리고 ’신민이 되다‘의 조합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고 비어 있는 두 글자의 자리에는 뒤에 나오는 5)로 미루어 보아 ’임나‘나 ’가라‘가 새겨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삼국사기 기록과 대조해 보기로 한다.
1)번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정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 이전까지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369년부터 시작해서 390년까지 백제와 고려가 잦은 전쟁을 벌였지만 백제가 우위에 있었으면 있었지 절대 고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칠 상황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하자 백제와 고려의 왕이 와서 항복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백제와 신라를 낮추고 고려를 높이려는 의도로 쓴 말치장에 불과하다. 백제를 굳이 흉악하다는 뜻을 지닌 ‘백잔’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광개토왕릉비의 기술태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2)번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 49년 기록에 왜가 백제와 함께 한반도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나눠가졌다는 내용이 있어 이 기록과 이야기가 비슷하다. 이 두 기록의 관계는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3)번 ‘396년 고려가 백제를 토벌하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큰 흐름에서는 일치하지만 시기나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는 391년 고려가 백제의 10성을 빼앗고 나중에 관미성까지 함락시키자 백제가 392년부터 계속해서 보복전쟁을 벌이다 395년의 공격을 마지막으로 기세가 꺾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 백제왕이 ‘영원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며 광개토왕에게 항복했다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은 신라왕이 ‘봄가을로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며 신공황후에게 항복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광개토왕릉비의 이 부분은 광개토왕을 미화하는 방향으로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4)번 ‘399년 백제가 다시 왜와 연대하였고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정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삼국사기에는 392년에 신라가 고려에 인질을 보냈고 397년에는 백제가 왜에 인질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5)번 ‘400년에는 왜군이 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신라성에 가득한 상태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일본서기에 유사한 기록이 있어 2)번과 함께 뒤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6)번 ‘400년 고려가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쫓아 임나가라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는 엄청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안 되어 있다.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이 사건을 언급한 기록이 아무데도 없다.
구체적인 토벌 경로가 자세히 나와 있는 점은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그러나 당시 한강유역에 있던 백제가 398년까지 고려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었고 400년 2월에는 요서지방의 연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 700여 리의 영토를 빼앗겼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고려가 5만의 대군을 한반도 남부까지 보낼 여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 또한 없다.
7)번 ‘400년 이후 신라가 고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과 8)번 ‘404년 왜가 대방에 침입하였으나 고려가 격퇴하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정황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고 있는 부분은 신공황후 편이다. 이 신공황후 편을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설화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8-화전국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권제9 신공황후
여름 4월 초하루 북으로 화전국 송포현에 이르러 옥도리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싯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싯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부자 나라를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싯대를 드니 비늘이 촘촘한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곳을 ‘매두라국’이라 불렀다. 지금은 ‘송포’라고 하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나라 여인이 매년 4월 상순에는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은어를 잡는 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남자는 비록 낚시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하였다. 이에 신전(神田)을 정하여 이를 경작시켰다. 그 때에 나하(儺河)의 물을 끌어다가 신전(神田)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여 도랑을 팠는데, 적경강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무내숙니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도랑을 ‘열전구’라 하였다. 황후는 강일포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황조(皇祖)의 영(靈)을 힘입어 넓은 바다를 건너가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뉜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인하여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 안위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할 곳이 있는데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되므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어리석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 웅대한 계략을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의 영(靈)을 힘입고 아래로는 군신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정돈하여 재물이 많은 땅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그대들과 함께 공을 얻게 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뜻이 있으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였다. 군신이 모두 “황후가 천하를 위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처음에 신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점점 역사기술을 하게 되는데 신공황후 편에 이르러서도 설화와 역사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있다. 이점은 유교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설화를 간략하게 소개만 해놓고 있는 삼국사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설화뿐만 아니라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에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있었던 사건도 끌어다 붙여 놓은 것이 있다.

32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을 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군선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이 이야기는 신공황후의 신라침공에 붙여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고 하며 소개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것은 석우로 피살사건이다.

309(<25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계유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가 객관에 와 있었는데 우로(于老)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걷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삼국사기에는 우로가 장군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신라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이전의 왕이 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일본서기의 우류조부리지간과 삼국사기의 우로는 발음이 비슷하여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왕 추가 왕망의 장수에게 살해당한 사건도 고려 장수 연비가 살해당한 것으로 바꿔놓고 있어 그런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우로가 249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고 열전에는 253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흘해 이사금의 재위기간이 310년부터 356년까지고 어릴 때 왕위에 올랐다고 하므로 우로에 관한 기록은 착오로 연도가 60년 앞당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로가 피살된 시기도 249년에 60년을 더한 309년일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우로에 관한 기사를 1주갑인상할 때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이나 당시의 정황과 더 잘 어울리는 점이 많다.
어쨋든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에 나오는 신라왕 살해사건은 309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우로 피살사건을 끌어다 붙인 것이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325(<2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봄 3월 계묘 초하루 기유일 신라왕이 오례사벌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허질벌한을 꾀어 “사신 오례사벌과 모마리질지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갈성습진언을 딸려 보냈다. 함께 대마에 도착하여 서해의 수문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모마리질지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미질허지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채하고 습진언에게 “미질허지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습진언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돌보게 했는데,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도비진에 이르러 초라성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원과 좌미‧고궁‧인해 4읍의 한인 등의 시조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제상의 이야기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41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박제상(혹은 모말毛末이라고 한다)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고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다.
...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배반하여 온 자와 같이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백제 사람으로서 전에 왜에 들어간 자가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왕의 나라를 도모하려고 한다고 참소하였으므로,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케 하였다.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을 포로하고 죽였으므로, 왜왕은 이에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기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未斯欣)과 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제상을 정말 배반한 자로 여겼다. 이에 군사를 보내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는데 겸하여 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임명하는 한편 앞잡이로 삼아 바다 가운데에 있는 산도에 이르렀다. 왜의 여러 장수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신라를 멸한 후에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데려 오자고 하였다. 제상이 그것을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하자, 왜인이 이를 보고 딴 마음이 없다고 여겨 기뻐하였다. 
이에 제상은 미사흔에게 슬그머니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떻게 혼자서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나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합니다.” 하니, 미사흔이 제상의 목을 껴안고 울며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다음날 제상은 방 안에서 혼자 자다가 늦게야 일어나니, 미사흔을 멀리 갈 수 있게 하려고 함이었다. 여러 사람이 묻기를 “장군은 어찌 이처럼 늦게 일어납니까?” 하니 “어제 배를 타서 몸이 노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밖으로 나오자,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드디어 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제상을 왜왕의 처소로 돌려보냈더니, 그를 목도로 유배 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에 목을 베었다.

신라에서 왜(倭)에 인질을 보냈는데 나중에 사람을 보내 구출했으나 구출하러 간 사람은 잡혀 화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그리고 삼국유사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먼저 인질을 보낸 시기에 대해 일본서기는 320년, 삼국사기는 402년 그리고 삼국유사는 391년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왜(倭)의 침공을 받은 시기는 391년이지만 인질을 보낸 전후 사정에 대해 삼국사기가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에 신뢰가 간다.
인질에 대해 일본서기는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 또는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삼국사기는 미사흔(未斯欣) 그리고 삼국유사는 미해(美海) 또는 미토희(未吐喜)라고 되어 있는데 발음이 비슷하여 모두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
인질을 구하러 간 사람에 대해 일본서기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삼국사기는 박제상(朴堤上) 또는 모말(毛末) 그리고 삼국유사는 김제상(金堤上)으로 되어 있는데 모마리질지와 모말은 발음이 비슷하여 동일인으로 보이고 박제상이나 김제상은 훗날 개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질이 탈출한 시기에 대해 일본서기는 325년, 삼국사기는 418년 그리고 삼국유사는 426년 이후로 되어 있다. 역시 전후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에 신뢰가 간다.
지금까지 든 예를 살펴보면,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은 설화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있었던 사건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한 목적은 분명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의 기록은 다른 사료를 통한 검증 없이 단독으로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다.
물론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전혀 없었던 사건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변형하여 기록해 놓았고 또 등장하는 인물들도 완전히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인물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다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의 기록은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어느 정도 참고자료로서의 가치는 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설화는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 기록이 시작되기 이전에 있었던 왜(倭)와 신라의 관계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재료를 담고 있다.
일본서기의 건국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뉘어졌을 때 국상립존과 국협퇴존 두 신이 태어났다. 
국상립존은 천경존을 낳고 천경존은 천만존을 낳았다. 천만존은 말탕존을 낳고 말탕존은 이장락존을 낳았다. 
이장락존이 왼쪽 눈을 씻었을 때 천조대신이 생겨났고 오른쪽 눈을 씻었을 때 월독존이 생겨났다. 또 코를 씻자 소잔오존이 생겨났다. 
소잔오존은 누이인 천조대신에게 못되게 굴었다. 참다못한 천조대신은 천석굴로 들어가 버렸고 해와 달은 빛을 잃었다. 여러 신들이 노력하여 겨우 천조대신을 천석굴에서 나오게 하자 해와 달이 빛을 되찾았다. 신들은 계속 말썽을 피우는 소잔오존을 고천원에서 쫓아내 버렸다.
신라국(新羅國)으로 내려온 소잔오존은 증시무리란 곳에 살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바다 건너 출운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팔기대사란 뱀을 한서검(韓鋤劍)으로 베고 뱀의 몸 속에서 초치검을 얻어 하늘에 바쳤다. 아버지 소잔오존을 따라 내려왔던 오십맹신은 나무의 종자를 많이 가지고 내려왔었는데 한지(韓地)에는 심지 않고 축자로부터 대팔주구국 안에 심어 산을 푸르게 하였다.
한편, 고천원에서는 다른 계통의 신들도 태어났다. 처음 태어난 신의 이름을 천어중주존이라 하고 다음으로 태어난 신을 고황산령존 그 다음 신을 신황산령존이라 한다.
천조대신의 아들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는 고황산령존의 딸 고번천천희와 결혼하여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이란 황손을 낳았다.
천조대신은 팔판경의 곡옥과 팔지경 그리고 초치검을 황손에게 주어 위원중국을 다스리게 했다.
일향의 고천수봉으로 내려온 황손은 오전에 이르렀다. 그 땅에 한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를 사승국이라 하였다. 황손이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황손이 나아가 머물렀다. 그리고 그 나라의 녹위진희란 미녀와 결혼하였다.
녹위진희는 바로 임신을 하였는데 황손이 이를 의심하자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불 속으로 들어갔다.
불 속에서 녹위진희는 화란강명, 언화화출견존 그리고 화명명을 낳았다.
화란강명은 낚시를 잘 하였고 언화화출견존은 사냥을 잘 하였다. 둘은 서로의 장기를 바꾸어 해보기로 하고 도구를 바꾸었는데 언화화출견존이 그만 형의 낚시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고민하는 언화화출견존을 염토로옹이 해신의 궁으로 보내 주었다. 그곳에서 언화화출견존은 형의 낚시를 되찾고 해신의 딸 풍옥희와 결혼도 하였다. 언화화출견존은 해신으로부터 밀물과 썰물을 조종할 수 있는 구슬 두 개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형을 제압하고 복종을 받아냈다.
한편, 해신의 궁에 있던 풍옥희는 바닷가로 나와 용으로 변해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을 낳았는데, 출산 장면을 보지 말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언화화출견존이 이를 엿보자 아이를 두고 바다로 돌아가 버렸다. 풍옥희는 여동생 옥의희를 보내 그 아이를 기르게 했는데 훗날 옥의희와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결혼하여 언오뢰명, 도반명, 삼모입야명 그리고 신일본반여언존 등 4남매를 두었다. 신일본반여언존이 곧 신무천황이다.

신라국이나 한지 그리고 한서검과 같은 말에서 한국과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한국의 설화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는 부분은 한국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떠올린다.

158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
동해의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국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하고 이에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 여겨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을 보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다시 그 전처럼 세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면서 왕에게 나아가 아뢰니 부부가 다시 서로 만나고 세오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이 나아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입니다.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므로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면서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자,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낸 이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하였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름에 들어있는 오(烏)은 까마귀를 뜻하는 한자인데 훗날 신무천황을 도와주었다는 팔지오도 역시 까마귀여서 서로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유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일본 설화는 또 있는데 바로 고사기에 나오는 천지일모 설화다.

고사기(古史記 712)
옛날 신라에 아구노마라는 늪이 있었다. 그 늪 가에서 한 여자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무지개와 같이 빛나는 햇볕이 몸을 비추더니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붉은 구슬을 낳았는데 이것을 보던 한 남자가 간절히 부탁하여 그 구슬을 얻어갔다. 어느 날 그 남자는 소를 끌고 가다 소를 잡아먹으려는 것으로 오해를 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오해를 풀기 어려웠던 남자는 예전에 얻은 붉은 구슬을 신라왕자 천지일모(天之日矛)에게 바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천지일모는 그 구슬을 마루 위에 두었는데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므로 부인으로 삼았다. 그녀는 매일 맛있는 요리를 해 주었으나 어느 날 천지일모와 다투게 되자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배를 타고 떠났다. 천지일모는 그녀가 있다는 난파에 가려 했으나 신의 방해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마침내 다지마국에 머무르다 그곳의 여자와 결혼하고 살았다.

한편, 일본의 건국설화에서 하늘의 자손이 내려와 지상의 사람에게 무언가를 묻는 부분은 한국의 구지봉 설화와 유사하다.

042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
원래 이곳에는 왕이 없었고 아홉 명의 추장이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다. 서기 42년 3월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사람들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또 사람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그러자 또 소리가 들렸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산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추장들이 이 말을 따라 모두 노래하고 춤을 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어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섯 알은 변해서 아이가 되었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 (伽耶國)이라 하니 곧 여섯 가야 (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하늘의 자손이 내려온 곳이 일본서기에는 고천수봉이라 되어 있지만 고사기에는 고천수의 쿠시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 くしふるたけ)라고 되어 있다. 구지봉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역시 서로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역사 기록의 형태를 띤 기술에서도 왜(倭)와 신라 및 임나의 밀접한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BC 2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선황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나갈질지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BC 2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3월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귀화했다.
(이 천일창은 고사기의 천지일모와 대응된다.)

BC 2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을 알 수 없다.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05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탈해 이사금이 즉위했다. 당시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昔)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

19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6월에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신라 및 가라와 왜(倭)는 설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서 서로 왕래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왜(倭)는 287년 이후 신라에 자주 침략해 왔다.

287년 4월에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 질러 태우고는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갔다.
289년 5월에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292년 6월에 왜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일길찬 대곡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게 하였다.
293(<233)년 7월에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294년 여름에 왜의 군사가 장봉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95년 왕이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묻자 홍권이,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300년 1월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309(<249)년 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312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44년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시집갔다고 하여 사절하였다.
345년 2월에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었다.
346년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364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393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402년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


왜(倭)의 침략은 312년에 혼인 관계를 맺은 이후 393년까지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80여 년 간 왜가 신라를 침공한 횟수는 346년과 364년 두 차례 밖에 없다.
한편,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에는 이 시기에 왜가 삼한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32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겨울 10월 초하루 화이진에서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 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 둘 바를 모른 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천운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이 있는데 일본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천황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 토지의 도면과 백성의 호적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말을 기르고 마구를 관리하는 부서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 없이 봄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아리나예 강이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물의 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 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군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재물이 많은 나라를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하찮은 일을 맡기는 부서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토지의 도적과 백성의 호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금, 은, 비단 등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세금을 일본국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고려와 백제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토지의 도면과 백성의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사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그러나 이 신라침공 기록은 매우 중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가 전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이야기를 변형하여 기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기록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면, 신라와 왜가 혼인관계를 맺기 전에 있었던 왜의 침공 중 어느 하나를 과장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312년을 기점으로 해서 이전에는 왜가 신라를 자주 침공하였고 이후에는 매우 뜸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공황후의 신라침공은 309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우로 피살사건에 대응하는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신공황후의 신라침공 기록에 덧붙여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며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을 죽이는 이야기를 이어놓은 것도 그런 심증을 더욱 굳게 만든다. 우류조부리지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로와 동일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건 뿐만 아니라 인물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기록에 나오는 파사매금(波沙寐錦)과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는 물론 삼국사기에 나오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과 미사흔(未斯欣)이다. 그렇다면 신공황후(神功皇后)는 누구일까?
신공황후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삼국지(289)에 나오는 비미호(卑彌呼)다. 비미호는 야마대국 여왕인데 238년부터 247년까지 위(曹魏)에 사신을 보내는 등의 활동이 있었다고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신공황후의 재위기간은 2주갑인상을 하지 않을 경우 200년부터 265년까지니 비미호와 비슷한 연대가 된다. 이로써 2주갑인상은 비미호를 신공황후로 둔갑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한편, 신공황후가 남편인 중애천황의 죽음을 맞아 직접 신라침공을 준비하는 과정은 후대의 제명천황 이야기와도 닮아 있다. 서명천황의 황후였다가 천황의 자리에 오른 제명천황은 660년에 백제가 망하자 구주까지 가 백제에 대한 지원군을 준비하였다. 따라서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는 데는 제명천황의 사례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고려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이 와서 항복했다는 신공황후 원년의 이 이야기는 물론 거짓말이다. 신공황후 46년의 기록에는 왜가 백제와 그때 처음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첨부파일
    0603.jpg [내려받기] [보기]
    2011-07-21_오전 124609.png [내려받기] [보기]
    epitaph.jpg [내려받기] [보기]

[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이태엽 06-15 09:13 
자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흉악범...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지만원, 자작나무 1996년...
 
Introduction |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