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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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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II)
이태엽 at 2010-10-12 01:44
URL http://kallery.net/s.php?i=407

한국통일 이전에는 한민족이 없었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서기전 91년에 편찬된 사기와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가 있다. 사기에는 대동강 유역에 있던 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삼국지에는 동이(東夷)라 하여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濊), 한(韓) 그리고 왜(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기에 나오던 조선은 삼국지가 편찬될 무렵에는 낙랑이 되어 있었다.

이 삼국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동이(東夷)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

먼저 중국에서 사용된 동이의 뜻을 살펴보면, 한(漢)나라 이전에는 동이가 산동반도를 포함한 중국 대륙의 동부지역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동이는 한나라에 통합된 후 한족(漢族)으로 동화되어 사라졌다. 한나라 이후에 사용된 동이는 만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에 살던 부여, 고려, 옥저, 읍루, 예(濊), 한(韓), 왜(倭) 등의 여러 종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말갈의 경우, 처음에는 동이로 분류되다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와 1060년에 편찬된 신당서에는 북적(北狄)으로 분류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동이가 또 다른 의미로 쓰였는데, 449년에 세워진 중원고려비에서는 신라를 동이라고 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599년 기록에서 일본을 동이라고 했으며 또 같은 실록의 1629년 기록에서는 청(靑)나라를 동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동이란 동질성을 바탕으로 해서 묶은 분류가 아니라 방향을 기준으로 해서 편의상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동이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동이족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서에서 동이로 분류된 여러 종족 중에서 읍루와 왜(倭)를 제외한 나머지만 동이족으로 묶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지도.

동이족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탁자식 고인돌이나 비파형 동검이 조선만의 문화라는 근거도 없다. 비파형 동검은 요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지만 이 지역에서는 탁자식 고인돌이나 미송리식 토기 그리고 세형 동검이 출토되지 않는다.


삼국지가 편찬될 무렵에는 부여 및 고려와 한(韓)은 분명히 낙랑에 의해 끊겨 있었다. 그리고 유사 이래 부여 및 고려가 한(韓)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부여 및 고려와 한(韓)을 같은 민족으로 묶는단 말인가?

흔히 제왕운기(1287)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그리고 맥은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시대였다. (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皆檀君之壽也)’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들어 부여 및 고려가 신라와 같은 민족이었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모두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왕운기의 이 이야기는 신화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 역사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같은 단군신화지만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으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어 이 점을 직감할 수 있다.

또 고려와 백제의 왕족이 혈통이 같으니 고려와 백제는 같은 민족이라는 주장도 많이 한다. 백제는 고려의 왕자 온조가 열 명의 신하와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이니 백제는 곧 고려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 지배세력의 정체성이 나라 전체의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당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 내에 있던 50여개의 작은 나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의 왕이 온조왕을 꾸짖는 내용이 있는데, 처음에 자신들의 동북쪽 땅 100 리를 떼어 주어 살게 해 주었더니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 졌다는 내용이다. 백제는 훗날 마한 전체를 아우르게 되는데, 그 과정은 마한의 토착민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들이 살던 땅만을 취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배자만 마한의 왕에서 고려의 유민으로 바뀌었을 뿐 백성들은 마한인 그대로였을 것이니, 마한을 통합한 백제도 알맹이는 곧 마한이라고 보아야 한다.

외부의 소수 유민이 흘러와 지배자가 되는 사례는 고대에 많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진한 땅 서라벌에 조선의 유민들이 골짜기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또 신라의 탈해왕은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는 다파나국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문무왕릉비나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신라의 김씨 왕족들이 스스로 흉노왕자의 후예를 자처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만약 지배자의 정체성이 곧 나라의 정체성이 된다고 한다면, 신라는 조선의 나라로 출발해서 왜(倭)의 나라가 되었다가 다시 흉노의 나라가 되는 괴상한 결과가 되고 만다.

대동강 유역에는 오래전부터 조선이 있었는데 이 조선은 연(燕)나라의 전성기 때 진번과 함께 연나라에 병합되었다. 서기전 222년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병합하자 조선도 진나라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서기전 206년 진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했을 때, 조선은 한나라의 영역에서 빠져 빈 땅이 되었다. 이 때 한나라의 제후국이던 연나라에서 위만이 무리 1,000여명과 함께 서기전 195년경 조선으로 왔다. 그리고 조선과 진번 사람들 그리고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유민들까지 규합하여 왕이 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위만조선이다. 그러나 이 위만조선을 세운 사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위만조선을 연나라와 동일한 종족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없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 진번, 임둔, 현도 이렇게 4군을 설치하였다. 이 한4군에는 중국으로부터 관료, 상인, 장인 등이 이주해 와서 살았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의 기록을 보면 낙랑의 한족 1,500명이 벌목하다가 진한에 포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낙랑의 평민들 중에도 한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발견된 서기전 45년의 낙랑군 호구조사를 보면 한족이 4만여 명이나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낙랑군 전체 인구 28만 명의 14%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낙랑은 조선을 이었지만 정체성에 있어서는 조선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낙랑은 313년 고려에 병합되는데 이 고려는 단일한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다종족 국가였다.

부여에서 나온 주몽은 처음에 말갈부락과 인접한 곳에 고려를 세웠다. 이후 고려는 예맥을 흡수하며 성장하였고 한(漢)나라로부터는 지속적으로 한족이 유입되었다. 물론 한나라로 유출되는 인구도 많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려와 한나라 사이의 주민이동은 다음과 같다.


047년, 10월에 잠지락부의 대가(大家, 고려의 벼슬 중 하나) 대승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179년, 신대왕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 이이모(고국천왕)가 왕위에 오르자 맏아들 발기는 소노가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요동지방의 군벌)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197년,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217년, 8월에 한나라의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가(家)를 데리고 투항해 오자, 왕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책성에 안치하였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고려 내에서 말갈족의 비중이 커졌다.

598년 영양왕은 1만 여 말갈 무리를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하였고 654년 보장왕도 거란을 공격할 때 말갈군대를 고려군대와 함께 출동시켰다. 645년 고려군 15만 7천여 명이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는데, 당태종은 이 중에서 부대장급 3천 5백 명은 당나라의 군인으로 채용하고 말갈족 3천 3백 명은 구덩이를 파서 묻었으며 나머지는 평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고려 패망 후 당나라의 내지로 끌려갔던 보장왕은 677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해져 요동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그는 말갈과 내통하여 고려부흥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유배되고 만다. 훗날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도 고려내의 말갈족 출신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발해는 옛 고려의 영토에서 말갈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되었는데, 발해를 건국하는데 토대가 된 이 말갈족 사람들은 원래 고려에 속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던 한(韓)은 단일종족 상태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민들이 계속 섞여 들어왔다. 

특히, 진한에는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거쳐 흘러들어온 유민이 있었다.


사기(史記 BC91)

연왕 노관이 (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연(燕)과 단(丹)의 무리가 요(遼)를 어지럽힐 때, 만(滿)은 유민을 거두어 해동에 모아 진번에 집결시키고 변방의 외신이 되었다.


위만조선의 건국에 관한 기록인데, 위만조선의 건국에는 진번과 조선의 토착민 뿐만 아니라 연(燕)과 제(齊)로부터 흘러온 유민들도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289)는 이 유민들의 유래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 289)

진승(陳勝) 등이 일어나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燕)·제(齊)·조(趙)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이 유민들은 한국으로도 흘러들어갔다.


삼국지(三國志 289)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진(秦)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과 제(齊)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289)

변진 24국 중에서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이었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략: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으로부터 진한으로 유민이 흘러들어갔다는 기록은 더 있다.


삼국지(三國志 289)

위략: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 289)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이 진한 6부는 훗날 신라로 발전한다.

오늘날에는 유민을 받아들이기 싫어하지만 고대에는 백성이 곧 자원이었기 때문에 유민을 적극 활용하였다. 게다가 중국으로부터의 유민은 발달된 문물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한(韓)은 신라와 백제 등으로 갈라져 수 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질감도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국통일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660년 백제를 무너뜨리고 668년 고려마저 무너뜨린 뒤 676년 즈음에는 임진강 이남의 영토를 단일정치단위 안에 넣게 된다. 그러나 200여년의 세월이 지난 900년에 견훤에 의해 백제가 건국되고 901년에는 궁예에 의해 고려가 세워지고 만다. 200여년이나 되는 세월동안 단일정치단위 안에서 살았지만 백제와 고려의 재건이 다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한국통일 이전의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가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왕고가 신라에 이어 936년 견훤백제를 통합한 후 250여년이나 지난 1190년과 1202년에 경주에서 신라부흥을 표방하는 대규모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났고, 1217년에는 평양에서 고려부흥을 표방하는 군란이 일어났으며, 1236년에는 담양에서 백제부흥을 표방하는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1267년에는 원(元)나라에 온 제주도의 사신이 백제의 신하를 칭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반란이나 봉기에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고대국가의 부흥을 내건 측면도 강하다. 그러나 동일한 반란이나 봉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조 이후로는 고대국가부흥을 내세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통일 이전의 이질감이 왕고의 후기까지도 민중들에게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500여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이질감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통합되기 이전의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가 이질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한국통일 이전의 한반도 주민들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다. 여러 종족이 섞여 살고 있는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유사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미얀마는 인구의 약 70%가 버마족이지만 샨족, 카렌족 등 소수민족도 많아 모두 135개 종족이 있다. 그래서 원래 국호가 버마(Burma)였지만 이런 소수민족들까지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1989년에 미얀마(Myanmar)로 개칭했다.

삼국의 언어
24사와 양직공도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삼국의 언어에 관한 기록들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진한의 말은 중국과 비슷하고 마한과 다르다. - 삼국지(289), 후한서(445), 양서(636), 진서(648), 북사(659)
(2) 낙랑과 진한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 위략(220-265)
(3)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 양직공도(526-539), 양서(636), 남사(659)
(4) 백제의 말과 옷은 대체로 고려와 같다. - 양직공도(526-539), 양서(636), 남사(659)
(5) 백제 말에 중국어가 섞여 있다. - 양직공도(526-539), 양서(636), 남사(659)
(6) 백제는 왕을 '어라하'라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고 부른다. - 주서(636)
(7) 일본천황의 조회에 발해 사신과 신라 어학생이 함께 참석했다. - 속일본기(797)

‘(1) 진한의 말은 중국과 비슷하고 마한과 다르다’는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서부터 659년에 편찬된 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한 내용으로 나온다. 이것은 이 이야기가 삼국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지에는 이 유민들이 낙랑지역에서 왔다고 하는데, 그들은 낙랑지역의 토착민인 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낙랑지역으로 이주해온 한인(漢人)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진(秦) 사람들과 유사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이들 유민은 진한 전체를 구성한 것이 아니고 진한의 일부로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2)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2) 낙랑과 진한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삼국지에 게재된 위략에 나오는 내용이다. 

삼국지(三國志 289)
위략에는,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의 지황 연간에 염사착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다. 우리들 1,500명은 목재를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염사착이 “나는 한(漢)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착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하자, 군은 염사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 명을 얻었는데 다른 500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착이 이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00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진한은 “500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15,000명과 변한포 15,000필을 내어놓았다. 염사착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군에서는 염사착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직과 밭 그리고 집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서기 125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을 면제받았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진한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던 낙랑 사람들’이란 낙랑지역의 토착민인 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낙랑지역으로 이주해온 한인(漢人)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진한 사람들은 (1)에서 말하는 유민들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위략의 기록을 살펴보면 문맥상 토착 한인(韓人)이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에서 진한 사람들이 낙랑지역에서 흘러온 유민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진한 전체를 구성한 것은 아닐 거라는 추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1)과 (2)를 통해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의 토착민과 조선의 토착민이 말이 통했는지 여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에 관한 기록은 없다.
‘(3)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는 양직공도에 나오는 내용인데 양서와 남사의 기록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백제 사신이 신라 사신과 양나라 관리 사이에서 통역을 한 것으로 해석이 된다. 당시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하여 백제 사신이 가는 길에 자신들의 사신을 딸려 보낸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던 거 같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백제 사신과는 말이 통하는 사람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만을 놓고 백제인과 신라인이 일반적으로 서로 말이 통했다고 성급하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백제 사신과 양(梁) 관리가 말이 통했다고 백제인과 양나라 사람은 일반적으로 말이 통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4) 백제의 말과 옷은 대체로 고려와 같다’는 양직공도에 나오는 내용인데 양서와 남사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록을 가지고 백제와 고려가 서로 갈라진 지 오래되지 않아서 말이 통하는 종족이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백제와 고려의 종족적 유래를 살펴보면, 백제는 조선의 남쪽에 있던 마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하였고 고려는 조선의 북쪽에 있던 부여계통의 종족에서 출발하였다. 이 두 종족은 최소한 조선과 낙랑이 존재했던 기간만큼은 조선과 낙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았다. 또 조선과 낙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기 전에 마한인과 부여인이 동족이었다는 근거도 없다. 따라서 마한인과 부여인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맞다. 만약 백제의 언어가 고려와 대체로 같다는 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백성이 아니라 백제의 지배층이나 사신의 언어가 고려의 지배층이나 사신과 비슷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지배층은 고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왕족의 성씨를 ‘부여씨’라 하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할 만큼 오래도록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따라서 마한 땅에 백제를 세우고도 지배층은 오래도록 부여의 언어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 기록의 시점까지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가 서로 다른 상태였을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정에 근거로 제시되는 기록도 있는데, 바로 주서에 나오는 ‘(6) 백제는 왕을 어라하라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고 부른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왕을 지배층의 말로는 어라하라 하고 피지배층의 말로는 건길지라고 한다‘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고려는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였기 때문에 고려의 말이란 것이 어느 종족의 말을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고려는 부여인 주몽이 말갈부락과 인접한 곳에 세운 나라였다. 당연히 성장하면서 말갈인도 상당수 흡수하였을 것이다. 427년에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중심지가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은 원래 조선의 영역이었는데 한(漢)에 흡수되어 낙랑이 된 이후에는 한족(漢族)이 많이 이주해 와서 살았다. 이제 낙랑 사람들이 고려의 중심이 된 것이다. 475년에는 백제 왕조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까지 흡수하였다. 이 지역은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양직공도가 만들어질 무렵에는 고려 내에서 한인(韓人)의 비중도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직공도에서 백제인과 비교된 고려인이 고려 내의 한인이었을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다.
‘(5) 백제어에 중국어가 섞여 있다’도 양직공도에 나오는 내용인데 양서와 남사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백제는 중국의 문물을 수입했으므로 중국어도 함께 묻어 왔을 것이고 또 백제에 중국인도 거주하였다고 하니 자연히 중국어가 백제어에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 (3), (4) 그리고 (5)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양직공도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신라에 대해 문자를 몰라 나무에 금을 새겨 문자를 대신했다는 설명이 있는 등 신뢰성이 다소 떨어진다. 왜냐하면 양직공도가 씌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에 이미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 일본천황의 조회에 발해 사신과 신라 어학생이 함께 참석했다.’는 신라인이 발해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통역을 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냥 일본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이 조회에 같이 참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밖에도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가 사신을 통해 서로 대화할 때 통역을 썼다는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삼국이 서로 말이 통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신라, 백제 또는 고려가 중국이나 왜와 대화할 때에는 통역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야만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통역을 통해 대화를 했다는 것 같은 사소한 일까지 역사책에 수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이나 말갈, 그리고 왜는 중국과는 달리 언어적으로 서로 가까웠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현대의 언어연구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지역의 말이 어순이나 기타 언어적 특징으로 볼 때 중국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에 있어서 삼국간의 유사성은 임나와 왜의 유사성이나 고려와 말갈의 유사성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임나는 왜와 교류가 활발했고 말갈은 고려와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이의 언어소통 문제는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사람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도 제주도 사투리는 육지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오래도록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살아 왔던 사람들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종족적 유래가 각기 달랐던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 사람들이 서로 말이 통했다고 보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
참고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남아있는 옛 지명을 비교해 본 결과 삼국의 어휘가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의 사서에서 신라의 기원에 관한 기록들을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01) 진한 또는 한(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 삼국지(289) 후한서(445)
삼국지는 진한이 옛 진국이라고 했고 후한서는 삼한을 소개한 뒤 모두 옛 진국이라고 했다.
(02) 진한 사람은 진(秦)의 고역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 삼국지(289) 후한서(445) 양서(636) 진서(648) 북사(659) 삼국사기(1145)
삼국지가 원본이고 후대의 사서들은 이를 전승한 것이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다. 또 진나라가 붕괴되는 과정에서도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연, 제 그리고 조나라 출신인데, 위만의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한반도와 인접한 연나라 출신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일부는 조선에 남았고 일부는 한국으로 이주하여 진한에 정착하였다. 물론 이때 진한에는 원래의 토착민들도 살고 있었다.
(03) 마한 사람이 진한의 왕이 되었다. - 삼국지(289) 양서(636) 진서(648) 북사(659)
진한이 한동안 마한의 통제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04) 신라는 낙랑의 옛 땅에 있다. - 수서(636) 북사(659) 구당서(945) 신당서(1060)
한국이 낙랑의 통제를 받았던 사실을 말한다.
(05) 신라는 진한에서 나왔다. - 양서(636) 북사(659) 삼국사기(1145)
(06) 신라는 변한의 후예다. - 구당서(945) 신당서(1060)
다른 기록들과 충돌하는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07) 신라는 고려의 패잔병이 세웠다. - 수서(636) 북사(659)
고려 동천왕은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옥저까지 도망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돌아오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다른 기록들과 충돌하는 내용으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북사에는 (5)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한 뒤 '이런 이야기도 있다'며 수서의 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어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08) 신라는 조선의 유민이 세웠다. - 삼국사기(1145)
여기서 말하는 조선의 유민은 진나라 시기에 조선을 거쳐 진한으로 유입된 중국의 유민으로 볼 수도 있고 위만조선이 망할 때 유입된 조선의 유민으로 볼 수도 있다.
(09) 백제 사람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 - 수서(636) 북사(659)
동일 사서 내의 (7)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마한 사람이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왕이 되었다는 (3)의 이야기나 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바다로 도망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한왕(韓王)이 되었다는 삼국지의 이야기와 혼동한 것이 아닐까?
(10) 중국 황녀의 아들이 신라왕이 되었다. - 삼국사기(1145) 삼국유사(1281)
삼국사기에는 중국 황녀가 진한으로 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다고 하고 삼국유사는 그 아이가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설화로 보아야 한다.

솎아내고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진나라의 통일과 붕괴 과정에서 연, 제 그리고 조나라에서 많은 유민이 발생하여 조선으로 왔다. 일부는 조선에 남아 위만조선을 세웠고 일부는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을 진한 땅에 살게 해 주었다. 그들 중 한 세력이 신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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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06-15 09:13 
자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흉악범...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지만원, 자작나무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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