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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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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7)-1 요서점유설
이태엽 at 2010-04-14 14:31
URL http://kallery.net/s.php?i=385


양직공도


백제의 요서점유설은 백제가 한때 중국 요서지방을 점령하고 통치했다는 주장이다.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책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요서점유설은 임나경영설과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또 서로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 시기적으로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 왜(倭)에 인질을 바치며 기대던 백제가 중국대륙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괴상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서점유설은 임나경영설과 비교하며 살펴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여기서는 기록, 정황 그리고 물증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요서점유설의 출발점이 되는 기록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송서(宋書 488 南朝梁 沈約 等)

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나중에 고려가 요동을 쳐 손에 넣자 백제는 요서를 쳐 손에 넣었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불렀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539 梁 元帝)

百濟 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畧有遼東·樂浪, 亦有遼西 晉平縣.

백제는 예로부터 오랑캐 마한에 속했는데, 진(晉) 말기에 고려가 요동과 낙랑을 공략하니 (백제도) 요서의 진평현을 차지했다.

(송서에 비해 진말이라는 시기와 낙랑이 추가되어 있다.)


양서(梁書 636 唐·姚思廉)

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진(晉) 때 고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 땅을 차지하고서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 

(양직공도에 비해 낙랑이 빠지고 백제군이 추가되어 있다.)


남사(南史 659 唐·李延壽)

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진(晉) 때 고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 땅을 차지하고서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

(양서와 내용이 동일하다.)


통전(通典 8세기말 唐 杜佑)

晋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진(晉) 때 고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였는데 지금의 유성과 북평사이다.

(양서에 비해 백제군이 빠지고 유성과 북평이 추가되어 있다.)


양서와 남사는 내용이 동일하고 다른 기록들도 거의 유사하다. 

이 기록들은 모두 남조 계통의 사료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의 대립상태였고 남조의 왕조에게만 조공을 해 오던 백제가 북조의 영역 안에 땅을 차지했다고 주장한다면 남조의 국가로서는 백제의 주장을 그대로 기록해 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별로 손해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남조의 왕조들이 왜(倭)의 요청에 따라 왜(倭)의 5왕에게 신라, 임나, 가라, 진한 그리고 마한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중국의 사서에 중국의 영토가 점령당했다는 기록이므로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맞지 않다. 요서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북조의 사서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서점유설을 뒷받침하는 남조의 기록은 임나경영설을 뒷받침하는 남조의 기록보다 신뢰수준이 더 높다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잠깐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사건의 시기를 추정해 보자.
이 사건이 송서(488)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송서가 편찬되던 488년 이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양서에는 진(晉) 때 일어난 일이라고 했으므로 범위가 더 좁혀진다. 265년에 세워진 진(晉)은 북방 유목민의 침략을 받다 317년에 망했는데 이때 왕조의 일부가 중국 대륙의 남쪽으로 도피해서 다시 진(晉)을 세웠다. 보통 앞의 진(晉)을 서진이라고 하고 뒤의 진(晉)을 동진이라고 하여 구별하는데 동진은 420년 왕조가 교체되어 송(劉宋)이 되었다. 그렇다면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한 사건은 265년에서 420년 사이의 일이 된다. 양직공도의 기록은 그 시기를 더욱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바로 고려가 낙랑을 공략하던 시기라고 한 부분이다. 낙랑은 313년 고려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313년 전후의 일이 될 것이고 양직공도에서 언급한 진(晉)은 서진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300년경의 지도


다음으로 요서점유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기록들을 살펴보자.


남제서(南齊書 537 南朝梁 蕭子顯 等)

490년에 위노(北魏 386-534)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그리고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495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 지난 경오년(490년)에는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날카로운 기운이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名(사법명)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假行征虜將軍 邁羅王으로, 찬수류를 假行安國將軍 辟中王으로, 해례곤을 假行武威將軍 弗中侯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行廣威將軍 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여기서 위노는 위(魏)에 대한 적대적 표현이고 험윤 또는 흉리는 오랑캐와 같은 일반적인 적대적 표현이다.

남제서의 기술대로 백제와 위(北魏)가 충돌했다면 당시의 지리조건을 생각해 볼 때 위(北魏)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침공했거나 백제의 땅이 요서지역에 있었거나 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나온다. 보통 항해기술에 있어서 백제가 위(北魏)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백제의 땅이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부여가 백제의 침입을 받았다거나 하는 다른 기록들과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된다. 그런데 양직공도나 양서에는 진(晉) 말기에 백제가 요서지방에 진출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백제의 요서진출은 늦어도 420년 이전의 일이다. 490년에 있었던 백제와 위(北魏)의 군사적 충돌도 요서지방에서 일어났다면 백제는 요서지방을 70년 이상 지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요서지방이 그토록 오랜 기간 바다를 건너온 백제에게 점유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정황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당시 요서지역은 선비족인 세운 연(燕)이 전연, 후연 그리고 북연으로 바뀌며 점유하고 있었고 436년 북연이 위(北魏)에 흡수된 이후로는 북중국의 패자인 위(北魏)에 의해 안정적으로 점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위서에는 472년 개로왕이 위(北魏)에 보낸 표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백제의 항해기술이 위(北魏)와 사신을 교환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되어 있다. 육로로는 고려에 막혀 백제의 사신도 위(北魏)로 가지 못하였고 위(北魏)의 사신도 백제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백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475년 고려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야 했으며 문주왕와 동성왕도 차례로 살해되어 501년 무령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안정되지 못하였다. 영산강 유역에는 이즈음부터 전방후원분이 축조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백제가 왜(倭)에 기대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당시의 정황상 백제와 위(北魏)가 충돌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째서 남제서는 백제와 위(北魏)가 충돌했다고 기술했을까?

남제서가 기술한 490년의 사건은 동성왕이 495년에 올린 표문과 내용이 동일하다. 다만 백제의 표문에서 험윤 또는 흉리라 칭해진 대상이 남제서에서 위노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원래 고려를 지칭했던 험윤 또는 흉리가 기록의 전승과정에서 위(北魏)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당시 백제는 한성을 두고 고려와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476-02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482-09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483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499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501-11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그 기록은 왜 없느냐는 의문이 또 생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다. 

기록이 분실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의 기록과 모순된다고 판단되어 버려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 표문이라는 것이 외교문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동성왕이 과장했을 가능성도 생긴다.

이러한 설명들은 다소 매끄럽지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다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위(北魏)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에도 위(北魏)와 백제가 490년에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500년경의 지도


진서(晉書 648 唐·房玄齡等)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고려, 백제,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오고자 한 것이 아닌데도 왔으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백제 왕족이 성을 부여라 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 나라이름 부여와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사(北史 659)

又以餘昌爲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571년에 또 여창(위덕왕)을 ‘지절 도독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동청주는 오늘날 중국의 산뚱지방을 가리킨다. 요서점유설과는 지역이 다르고 연대도 150년 이상 차이가 난다. 고씨의 제(齊)는 일 년 전에 위덕왕에게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이란 작위를 주었었고 6년 전에는 신라 진흥왕에게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의 작위를 주었었다. 이 당시 대방과 백제는 거리가 멀었고 낙랑과 신라도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이러한 작위들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외교적인 인사치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 945)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

677년에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채 죽었다. 그의 손자 경(敬)이 측천 때에 대방군왕에 습봉되어 위위경을 제수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백제 땅이 신라와 발해에 의해 분할되었다는 뜻인데 발해의 영역은 대동강의 북쪽 그리고 요하강의 동쪽 지역에 있었으므로 백제의 옛 땅도 거기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기록도 요서점유설과는 지역이 다르다. 또 부여융이 사망한 해는 682년인데 이때는 동진이 멸망한 지 260여년이나 지난 후이므로 연대도 차이가 크다.)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

통전과 당서에, “백제가 망하니, 그 땅이 신라ㆍ발해ㆍ말갈에게 분할되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서 그 글을 인용하였고, 통감에서도 그를 따랐으니 잘못이다. 발해ㆍ말갈과 백제는 서로 남북으로 동떨어져 있는 사이라, 비록 침략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땅을 나누어 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를 취하지 않는다.


자치통감(資治通鑑 1084 司馬光)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전에 부여가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해왔는데 방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

중국 사람들이 항상 부여와 백제를 혼동해 일컫기 때문에 남사에는, “진(晋) 때 구려가 요동을 점유하고 백제 또한 요서의 진(晋)ㆍ평(平) 두 고을을 점거하였다.”고 하였고, 자치통감 진목제 영화 2년에는, “처음에 부여가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구려의 오류인 듯하다.)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소산해지므로 서쪽으로 옮겨 연(燕)에 근접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말은 모두 중국에서 그릇 전문된 것인데, 억단하여 의견을 세워 놓은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1084 司馬光)

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488년 위(北魏 386-534)가 군사를 보내 침공했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이 기록은 남제서의 490년 기록과 연도만 제외하고 일치한다.)


삼국사기(1145)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마한은 고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 월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북경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의 연과 제, 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최치원이 당나라의 고위 관리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인데, 백제와 고려의 위대함을 내세우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백제와 고려가 중국을 괴롭히는 악당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외교문서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언급된 내용을 사서기록과 동일한 수준의 신뢰성을 부여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마한이 고려가 되고 변한이 백제가 되었다.’는 인식에서 알 수 있듯이 최치원의 언급은 역사적 사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이처럼 요서점유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기록들은 여러 사서에 많이 흩어져 있고 또 그 낱낱의 기록만 놓고 보면 백제의 대륙진출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그러한 기록들을 통합해 보면 지역이나 연대가 제각각이어서 공통분모를 끌어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에서 살펴보았듯이 임나경영설은 일본서기에 기록이 풍부히 남아있고 남조의 사서와 광개토왕릉비에 있는 기록으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따라서 요서점유설은 임나경영설에 비해 기록의 뒷받침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요서점유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265년과 317년 사이의 정황을 살펴보자. 265년은 진나라가 세워진 해이고 317년은 진나라가 망한 해다. 아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주요 내용을 뽑아 본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265-317]

266-08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힘센 군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쳐서 우리 군사를 이겼다.

272-11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278-10 군사를 내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283-09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286-01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286 고구려가 대방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298-09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304-02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쪽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주변의 신라, 고려, 대방, 낙랑 등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이다. 황해를 건너 요서지방을 점령할 정황은 전혀 아니다.

그러면 요서점유설에서 언급된 진(晉)을 동진으로 보고 역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391-420]

391-04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392-07 고구려 왕 담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393-08 왕이 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끌고 돌아왔다.

394-07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395-08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밑에서 머물렀다.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을 돌려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397-05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398-08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곧 중지하였다.

402-05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403-02 왜국의 사신이 왔다.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405 전지왕은 아신이 재위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는 왜인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406-02 사신을 진(晉)에 보내 조공하였다.

409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416 동진(東晉)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명하여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418 여름에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열 필을 보냈다.


391년부터 고려와 혈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모두 패하고 결국 왜(倭)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며 기대고 있다. 역시 황해를 건너 요서지방을 점령할 능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도 백제가 왜(倭)에 인질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광개토왕릉비, 일본서기, 남조의 여러 사서 그리고 수서의 기록까지 모두 왜(倭)가 한반도 남부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정황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정황상으로 봤을 때는 임나경영설이 요서점유설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요서점유설과 임나경영설의 물증을 비교해 보자.

요서지역에서 백제계의 유적이나 유물이 나온 적은 없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에서는 왜계의 유적과 유물이 어느 정도 출토된다.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는 왜계의 전방후원분과 왜계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물론 이런 왜계의 유적과 유물이 반드시 임나경영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열도에서도 한반도계의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단순한 교류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서지방에서 백제계 유적과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데 비한다면 한반도 남부에서 왜계의 유적과 유물이 다소나마 출토되는 것은 임나경영설의 가능성을 요서점유설의 가능성보다 높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모두 정리해 보면 기록, 정황 그리고 물증 어느 모로 보나 요서점유설은 임나경영설보다 가능성이 크게 뒤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877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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