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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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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7)-2 신라김씨 흉노유래설
이태엽 at 2010-04-14 14:25
URL http://kallery.net/s.php?i=379


 

신라김씨란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김(金)씨 가문을 말하는데 경주김씨와 경주김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많은 김씨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여기에는 김일성의 본관인 전주김씨와 김구의 본관인 안동김씨도 포함되어 있다. 신라김씨 흉노유래설은 이러한 신라김씨의 공통 조상인 김알지가 흉노 왕자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김씨뿐만 아니라 감천문씨, 광산이씨 그리고 수성최씨도 김알지의 후손이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라김씨 흉노유래설’이 아니라 ‘김알지 흉노유래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김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조시대 조속의 금궤도


060 삼국유사(1281)

8월 4일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시림(始林)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있던 아이가 바로 일어났다. 이것은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금상자에서 나왔으므로 金씨를 성으로 삼았다.


065 삼국사기(1145)

봄 3월 밤에 왕이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에 일러 “이는 어찌 하늘이 내게 내려준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둬 길렀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다. 그가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金氏)라 했고,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이것으로 국호를 삼았다.


삼국유사(1281)

금상자에서 나왔으므로 김(金)씨를 성으로 삼았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仇刀라고도 한다)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즉위하니 신라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262 삼국사기(1145)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味照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선조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나중에 대보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았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沾解)가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1145)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이 지었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비문에 보인다.


여기서 김부식이 말하는 소호금천은 중국의 3황5제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을 뿌리라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고 알지 설화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점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경주김씨이건만 자신의 뿌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호금천의 후손을 자처한 데 이어, 신라의 김씨 왕족들은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도 자처하였다.


681 문무왕릉비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 투후(秺侯)는 김일제가 한나라의 무제로부터 받은 벼슬 이름이다.


864 대당고김씨부인묘명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 여기에 나오는 요동(遼東)은 요하 동쪽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라까지 포함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흉노족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서기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중국 북방에 있던 흉노족도 통합을 이루고 동으로는 대흥안령 산맥에서부터 서로는 예니세이강까지 활발한 정복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흉노족의 침략을 두려워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이 죽은 후 중국은 다시 분열되었다가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친 한나라의 유방에 의해 다시 통일된다. 이때 유방은 흉노까지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였으나 도리어 전쟁에 패하고 만다. 그래서 서기전 198년에 공주와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런 혼란기에 연나라의 위만이 대동강 유역으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흉노는 한나라에 대해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서기전 141년에 무제가 한나라의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게 된다. 무제는 지속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였고 그 결과 흉노는 내분이 일어나고 약해져서 일부는 한나라에 복속하고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게 된다. 이때 쫓겨 간 흉노족이 훗날 로마제국을 붕괴시킨 훈족이 되었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한편, 무제는 조선이 흉노와 연결될까 염려해서인지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4군을 설치하였다.

신라김씨의 조상으로 주장되는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족의 번왕인 휴도왕의 장남이었는데 한나라 무제가 흉노를 토벌할 때 포로가 되어 노비로 전락하였다. 그는 말을 기르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나중에 무제의 신임을 받아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무제에 대한 암살시도를 막아준 일을 계기로 투후(秺侯)에 봉해지고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잘 살았다.

김씨부인묘명에 나오는 사건, 즉 '김일제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하고 있을 때 한(漢)에서 일어났을 난리'로는 신(新)의 건국과 패망이 가장 유력하다. 왕망은 서기 9년에 한(漢) 왕조를 폐하고 신(新)을 세웠으나 서기 23년에 망해서 다시 한(漢) 왕조로 돌아갔다. 김일제의 후손은 이 과정에서 중국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낙랑을 거쳐 신라에 왔는데, 훗날 왕족이 된 그들의 후손들이 자기 조상의 신라 진입을 알지 설화로 신성화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정치적 격동이 있을 때 패배자가 요하를 건너 망명해 오는 사례는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동수인데, 그는 연나라(前燕)가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내전에서 패하자 고려로 망명하였다. 그의 무덤은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규모나 벽에 기록된 글의 내용을 보면 그가 고려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높은 지위 정도가 아니라 외부에서 흘러온 사람이 아예 왕이 되는 사례도 많다.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거나 북부여를 도망쳐나온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고려를 세웠다거나 고려를 이탈한 온조가 마한에서 백제를 세웠다거나 하는 예를 들 수 있다.

신라김씨의 경우 오랜 기간 신라의 국정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다 나중에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신라김씨 흉노유래설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진흥왕 이전의 기록에 김씨 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양서(636)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524 울진봉평신라비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한자로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39 울주천전리각석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565 북제서(636)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신라 뿐만 아니라 고려도 장수왕 이전의 기록에 고씨 성이 보이지 않으며 백제도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에 여씨 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신라의 왕족이 된 이 가문이 훗날 김씨 성을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김일제와 소호금천으로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생긴다. 옛날에는 왕조가 정치적 목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날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당나라 숙종의 후예를 자처한 왕씨고려를 들 수 있다.

물론 신라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 맞지만 중국에서 망명한 처지라 성씨를 숨기고 수백년을 지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정은 신라가 가까운 중국을 놔두고 먼 초원과 교류하게 된 이유도 설명해 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한편, 고고학적 양상을 들어 신라김씨가 초원에서 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초원의 무덤 양식인 kurgan과 흡사하고 신라의 금관이 초원 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무, 사슴뿔 그리고 새를 형상화하는 등 신라의 고고학적 양상이 초원 문화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웃한 백제나 고려와 비교하면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초원에서 신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한국으로 흘러온 고대 유민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진(秦) 말기의 혼란을 피해 연(燕)·제(齊)·조(趙)의 유민들이 조선으로 왔다. 

(2) 그들 중 일부가 한국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의 진한에 살게 하였다. 

(3) 한(漢) 초기에 연(燕)의 위만이 천여 명의 무리를 데리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4) 위만 시기에 요하 유역의 혼란을 피해 유민들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진번에 집결시켰다.

-- 진번은 훗날 대방, 마한 또는 백제가 되었다.

(5) 우거왕 시기에 역계경이 2천여 호를 데리고 조선을 떠나 진국으로 갔다.

-- 진국은 훗날 진한이 되었다.

(6) 고려의 공격을 받아 낙랑의 주민 5천명이 신라로 들어왔다.


기록 상으로는 초원으로부터의 유민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록에 잡히지 않은 유민이 있을 수 있고 삼국지(289)와 송서(488) 사이에 기록이 촘촘하지 않은 시기가 있어, 기록을 근거로 신라김씨 초원유래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한편, 신라가 띤 초원 문화의 특색은 주민의 이동이 아니라 문화의 전파로도 설명할 수 있다.

고려와 백제는 낙랑과 대방을 통해 중국 문화를 많이 흡수하였고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도 활발했다. 반면 신라는, 앞서 예를 들었듯이, 고려나 백제에 비해 매우 늦게 중국과 교류를 시작하였다. 고려나 백제가 중국을 통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때 신라는 초원길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신라의 고고학적 양상이 초원 문화의 색채를 띠는 것과 역사 기록에 초원으로부터의 유민이 없는 사실을 모두 만족시킨다.

물론 신라와 초원길 사이에는 고려가 있었는데 왜 신라는 고려보다 더 초원 문화의 특색을 많이 띠었는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한편, 고고학적 양상을 기반으로 한 신라김씨 초원유래설은 신라김씨가 흉노 왕자의 후손을 자처한 사실과 다소 모순된다.

김일제의 후손이 한나라의 조정에 7대에 걸쳐 참여하는 동안 적석목곽분을 쓰는 등 흉노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신라에 들어올 때 이를 들여왔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김알지가 등장하고 수백년이 지난 후에 나타난다.

그런데 왕족이 된 이후 신라김시가 김씨 성을 도입한 거라면 왜 하필 김일제의 가문을 선택했을까?

중국과 교류를 트기 전까지 신라가 초원과 활발한 교류를 한 것은 사실이다.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중국식 성씨를 도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는데, 중국의 여러 가문 중에서 아무래도 초원에서 유래한 김일제 가문이 신라의 취향에 맞았을 수 있다.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뿌리를 신성화할 때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과 연결짓지 전혀 연관이 없는 것과 연결짓지는 않을 것이다.



참고 http://qindex.info/d.php?c=1763

신라민족론 http://qindex.info/d.php?c=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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