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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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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신라민족론] (6) 왕씨고려는 고려를 계승하였나? (I)
이태엽 at 2010-04-13 23:10 /
URL http://kallery.net/s.php?i=376

신라말기에 백성들의 마음이 신라왕조로부터 멀어지자 지방의 호족세력들이 신라왕조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왕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각기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애쓰게 되었는데, '백제계승'이니 '고려계승'이니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계승을 내세운 견훤은 백제와의 연관성이 없었고 고려계승을 내세운 궁예나 왕건도 고려와의 연관성이 없었다. 왕씨고려의 영토와 인구는 신라의 그것들과 일치하며 왕고의 지배세력들도 모두 신라인들이었다. 따라서 왕고의 실체는 신라의 후속국가이며 고려계승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내세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왕고가 사용한 이 고려라는 국호 때문에 한민족의 정체성에 혼동이 왔다.
 

견훤설화가 얽혀 있는 금하굴. 


견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견훤은 지금의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문경이나 인접한 상주에는 견훤의 탄생설화가 있는 금하굴, 견훤이 무예를 연마하고 명마를 얻었다는 말바위 그리고 견훤이 주둔하며 세력을 키웠다는 견훤산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농민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된 아자개였다. 아자개와 견훤은 모두 처음에 이씨였었는데 나중에 견씨로 바꿔 각각 상주견씨와 황간견씨의 시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아자개가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비가기(李碑家記)의 기록이 소개되어 있다. 또 고기를 인용하여 아래와 같은 견훤설화도 전하고 있다.


三國遺事(1281) 卷 第二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낯선 남자에 의해 임신을 한다는 이야기는 일본의 고사기(712)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견훤설화가 그것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있었던 한국의 토착설화가 고사기와 견훤설화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

견훤은 서남 지방의 장수로 있다가 892년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 칭하였다. 그리고 900년에는 전주를 점령하고 백제왕을 자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고마움을 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총장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후백제 왕을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니 이때는 당나라 광화 3년(900)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백제왕을 칭하기 전까지 견훤과 백제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다만 고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설화에서 견훤이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고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견훤의 외가가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200여 년 전 백제의 땅이었던 지역에서 신라에 반기를 들고 세력을 키우는 데에는 백제계승 만큼 좋은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궁예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 헌안왕이라고도 하고 경문왕이라고도 하는데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궁예의 어머니는 이름 모를 궁녀였는데 궁예는 단오 날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날 때부터 이가 나고 이상한 빛까지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라 명했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그를 마침 밑에 있던 유모가 받아내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애꾸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유모에 의해 길러지다 세달사라는 절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892년 궁예는 신라에 반란을 일으킨 양길의 부하가 되더니 강원도와 경기도 지방을 휩쓸며 큰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다 901년 마침내 고려를 세워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천복 원년 신유(901)에 선종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 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다. 그 칼 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고려를 세우기 전까지 궁예는 고려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북쪽에는 이미 고려계승을 표방하는 발해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민심을 잃고 있었고 서남쪽 지방에서는 견훤이 백제를 건국한 상태였으므로 궁예가 그들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고려계승만한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 궁예는 고려계승보다는 불교이상사회의 건설을 앞세우게 되는데 이내 왕건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쫓겨나고 만다. 이것은 고려계승이라는 패권주의적인 정치구호가 불교이상사회의 건설이라는 종교적인 정치구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왕건
왕건의 뿌리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뿌리를 찾아서'에 실려 있는 개성왕씨의 연원을 보면 아래와 같다. 개성왕씨는 왕건이 속한 성씨다.

'중국 황제 헌원의 17세손인 조명은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후 조명의 후손 수극은 조선의 기자왕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받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왕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수극의 60세손인 왕몽이 당시 건국초기였던 신라에서 시중이라는 벼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화를 당할까 두려워 일곱째 아들 왕림과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10여 년 동안 수도하면서 전, 신, 차 등으로 성을 바꾸며 이름도 무일이라 했다. 그 차무일의 셋째 아들이었던 왕식시의 후손이 바로 왕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의 유민들이 신라를 세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맞물려 왕건의 조상이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신라로 왔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한편 고려사(1451)에 실려 있는 설화에는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후손으로 나온다.


‘옛날에 성골장군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전국을 유람하다가 부소산 기슭의 산골마을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정착하고 결혼도 하여 살게 되었다. 그는 체격이 우람하고 화살도 잘 쏘았으며 또 남부럽지 않게 부유하게 살고 있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사냥으로 즐거움을 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함께 매를 잡으러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동굴의 입구를 막고 으르렁 대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자기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면 다른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각자 모자를 호랑이에게 던져 호랑이가 무는 모자의 주인이 그 희생양이 되기로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호경의 모자를 물게 되고 호경은 하는 수 없이 굴 밖으로 혼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호경을 물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는데 바로 그때 사람들이 들어가 있던 굴이 무너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호경은 호랑이가 자신을 살린 것을 깨닫고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몰사한 사람들을 위해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랬더니 산신이 홀연히 나타나 자신은 혼자 산을 지키는 과부인데 호경과 부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경은 산신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호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호경은 옛 아내를 잊지 못하고 그녀의 꿈속에 자주 나타나더니 마침내 그녀는 호경의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 아이는 이름을 강충이라 지었는데 몸이 단정하고 재주가 많았다. 강충은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에게 장가들어 오관산 마가갑에 살았다. 그즈음 풍수에 능한 신라인이 지나다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를 가리고 부소군청을 부소산의 남쪽으로 옮기면 장차 삼한을 통일할 왕이 날 것이라 하므로 강충은 그렇게 하고 지명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이후 강충은 벼슬이 높아지고 재산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제건과 손호술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손호술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는데 지리산으로 출가하여 이름을 보육으로 고쳤다. 하루는 보육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곡령재에 올라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더니 남쪽이 그 오줌으로 바다가 되어버리는 꿈이었다. 형 이제건이 보육의 꿈 이야기를 듣고 비상한 인물을 낳을 태몽이라며 자기 딸 덕주를 아내로 주었다. 보육은 아내와 함께 마가갑에 지어놓은 암자에 살며 두 딸을 두었는데 둘째 딸의 이름은 진의였다. 진의는 얼굴이 곱고 지혜로운 여자였는데 어느 날 언니가 오관산 마루턱에서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천하에 가득 찼다는 꿈 얘기를 하자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의 꿈을 사게 되었다.’


왕건의 조상에 관한 설화는 매우 긴데 여기까지가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외가 쪽 내력이다.


'서기 753년 아직 왕자로 있던 당 숙종은 동방의 산천을 유람하다 송악에 있는 보육의 집에서 묵게 된다. 보육은 숙종이 중국의 귀인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자신의 딸과 맺어 주려 큰 딸을 들여보내 숙종의 찢어진 옷을 꿰매게 한다. 그러나 큰 딸이 방문을 넘다 엎어져 코피가 나게 되므로 둘째딸 진의를 들여보낸다. 한동안 보육의 집에 머물던 숙종은 진의가 자신의 아이를 밴 것을 알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이 태어나면 전해주라는 말을 남기고 당나라로 돌아간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작제건인데 그 아이는 매우 총명하여 숙종이 남긴 활과 화살을 매일 가까이 하더니 신궁이 되었다. 어느 날 작제건은 아버지를 찾으러 당나라로 가는 상선에 타게 되었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짙은 안개를 만나자 상인들로부터 바다에 버려지게 된다. 그때 용왕이 나타나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으므로 그 여우를 잡아달라고 작제건에게 간청하였다. 작제건이 마침내 관음보살로 변장해서 용왕을 괴롭히던 여우를 죽이자 용왕은 작제건에게 소원을 한 가지 말해보라고 한다. 작제건이 동방의 왕이 되고 싶다고 하자 용왕은 '건'자가 붙은 자손까지 3대를 내려가야 왕이 나올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자 작제건은 동방의 왕 대신 용왕의 사위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자 용왕은 큰딸 처민의를 그에게 내어준다. 작제건은 처민의와 함께 송악으로 돌아와 네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을 용건이라 했다. 용건은 나중에 이름을 융으로 고쳤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나 혼인을 간청하고 실제로 길에서 그 여인을 만나게 되자 그 여인과 혼인하게 된다. 용건과 그 여인 사이에 난 아들이 바로 왕건이었다.'


언니의 꿈을 사서 귀인과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1145)에 나오는 김유신 누이의 이야기와 똑같다. 당나라 숙종의 후손을 자처한 것은 왕씨고려가 자신들의 권위와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보이는데, 이 설화는 나중에 웃지 못 할 일화를 남긴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왕고의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원나라의 학자가 와서 물었다.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이라고 하는데 어떤 근거가 있은 건가요? 사실 숙종은 평생 대궐 밖을 나간 적이 없는데 언제 신라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충선왕이 말문이 막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옆에 있던 학자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다.

"아 그것은 국사에 잘못 기재된 것입니다. 숙종이 아니라 선종입니다."

당나라의 선종은 왕이 되기 전에 안록산의 난을 피해 여러 곳을 도망 다녔으므로 원나라의 학자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왕건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왕건과 고려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이 호족으로 있었던 송악이 200여 년 전에는 고려의 땅이었었다는 것만이 왕건과 고려를 연결시켜 줄 수 있을 뿐이다. 그 지역은 350여 년 동안 고려의 땅이었었지만 그 전에는 400여 년 동안 낙랑군 또는 대방군의 영역이었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에는 200여 년 동안 신라의 땅이었다.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고려로 고쳤다. 그리고 궁예가 내세운 고려계승을 이어받게 되는데 이것은 신라와 견훤백제에 맞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궁예가 처해 있었던 상황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1145) 또한 왕고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於故髙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말한다.

http://db.history.go.kr/id/sg_034r_0020_0200


여기서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토는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왜 삼국사기는 고려가 점유했던 사실을 강조했을까?

이것은 왕고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나와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했는데 원래 신라 안에 고려가 없었다면 뭐가 될까? 북쪽에는 고려를 계승했다는 발해도 있었고 그 발해를 흡수한 요나라도 있었는데...



위 지도의 첫 번째는 백제가 한성에 있을 때고 두 번째는 고려가 한성을 차지했을 때며 세 번째는 신라가 한성을 차지했을 때다. 마지막은 한국통일 이후의 신라 행정구역이다.



이성계

이성계는 스스로 조선의 후예를 자처했으나 전주이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당나라에서 왔다는 주장과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도 있어 명확하지 않다. 시조 이한은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때 사공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한의 18세손 이안사는 전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관리와 갈등이 생기자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몽골이 쳐들어 와 함경도 일대를 장악하고 1258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자 이안사는 따르는 1,000여 호의 사람들과 함께 그곳으로 귀순하여 몽골제국으로부터 다루가치의 벼슬을 받았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몽골제국의 관작을 계속 이어받다가 1356년 왕씨고려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이안사의 증손자 이자춘이 도움을 주면서 왕고로부터 관작을 받게 된다. 그 이자춘의 아들이 바로 이성계다.

이성계는 왕고의 장수로 있다가 1392년 공양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왕고의 왕족들을 모두 강화도와 거제도에 몰아넣었다가 2년 후 이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켜 버렸다. 살아남은 사람은 왕씨의 제사를 담당하는 왕우 삼부자밖에 없었다. 왕우는 공양왕의 동생인데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을 해서 이성계와는 사돈지간이었다. 이어 전국에 걸쳐 왕씨 색출작업을 벌여 발견되는 대로 목을 베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성을 전(全), 옥(玉)등으로 바꾸어 숨어 살게 되었다.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처음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다 '조선과 화녕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고 명나라에 물어 이듬해 조선을 쓰라는 답을 얻게 되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조선계승을 표방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처럼 왕고의 왕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국호도 조선으로 바꿨으니 왕고와 이조는 역사가 완전히 단절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왕고와 이조는 왕조가 바뀌고 국호가 바뀌었을 뿐 영토와 백성은 동일하다. 이조는 곧 왕고의 후속국가인 것이다.

 


김일성
김일성의 본관은 전주김씨인데 시조 김태서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의 8세손이다. 그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1254년 경주를 떠나 전주로 이주하여 전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김일성의 12대조인 김계상이 전주를 떠나 평양으로 이주함으로써 이후 그의 후손들이 평양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면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는 군민을 이끌고 이를 격퇴하는데 앞장섰다. 또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혁명가의 가문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일찍이 14살이 되던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1942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던 백두산 밀영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그러나 소련 측의 기록을 보면 김정일이 하바롭스크 크라이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그 당시 김일성이 소련군에서 일하고 있을 때이니 소련의 기록이 맞을 것이다. 또 14살 때 무장투쟁조직을 결성했다든지 증조부가 제너럴 셔면호를 격퇴하는데 앞장섰다든지 하는 주장들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사실과 거짓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왕건이나 이성계가 자신들은 물론 조상들까지 신격화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김씨조선은 신라를 부정하고 조선-고려-발해-왕씨고려로 이어지는 계통을 정통으로 내세운다. 이것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 이씨조선의 수도 한양이 모두 한국에 속해있고 조선과 고려의 수도 평양과 왕씨고려의 수도 개성이 자신들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왕건이 고려계승을 내세워야 했던 상황과 김일성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3황5제의 후손들
삼황오제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이다.
3황: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
3황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일곱 가지의 조금씩 서로 다른 설이 존재한다. 십팔사략에는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 이렇게 세 명이 나와 있다. 태호 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사냥하는 법과 불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염제 신농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농업과 상업을 가르쳤다. 황제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을 짓는 법과 옷감을 짜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수레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문자도 발명하고 천문, 산술 그리고 의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황제 헌원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치우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치우는 눈이 네 개이고 손은 여섯 개나 달려 있었으며 머리는 구리 그리고 이마는 쇠로 되어 있었다. 그는 쇠와 돌을 먹고 싸움에 매우 능한 신이었는데 탁록에서 황제 헌원에게 패하여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항복하였다. 황제 헌원은 100살이 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고 그의 자손인 5제가 세상을 다스렸다.
5제: 소호 금천 - 전욱 고양 - 제곡 고신 - 제요 도당 - 제순 유우
5제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설이 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 이렇게 다섯 명으로 나와 있다. 소호 금천은 황제 헌원의 아들로 왕위에 있을 때 봉황이 날아들어 정치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전욱 고양은 소호 금천의 조카인데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던 하늘과 땅을 엄격히 구별하고 인간세상에서도 주종관계와 남녀관계의 질서를 세웠다. 제곡 고신은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제요 도당은 제곡 고신의 아들로 치세기간동안 농사법을 발전시키고 1년을 366일로 정했으며 관직을 정비하고 궁전 입구에 북을 달아 백성들이 직접 자신에게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가족들이 화합하고 관리들이 공명정대하였으며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 제요 도당이 즉위하던 서기전 2333년은 단군이 조선을 세운 해이기도 했다. 제요 도당은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효성이 지극한 순을 발탁하여 두 딸을 시집보내더니 나중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물려주었다. 제순 유우는 제요 도당이 죽자 제요 도당의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변방에 은거하였으나 백성들이 찾아와 계속 왕으로 섬기므로 천명을 따라 왕이 되었다. 제순 유우는 전문적인 직분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토벌하였으며 우를 등용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제순 유우는 자신의 아들 상균보다 우가 더 백성을 잘 다스릴 것으로 판단하여 우를 후계자로 삼았다. 5제의 마지막 두 임금  제요 도당과 제순 유우의 시대에 특히 사람들이 태평성대를 누렸으므로 이 두 임금이 다스린 시대를 요순시대라 하여 '되돌아 갈 수 없는 좋은 시절'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요와 순 모두 자신의 아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 사례는 이후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자주 이용되기도 하였다.
제순 유우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은 우는 부자세습제를 확립하여 하나라를 세웠다. 이 하나라는 서기전 2070년에서 서기전 1600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폭정을 일삼다 상나라의 시조 탕왕에게 토벌되었다. 상나라는 은나라라고도 하는데 탕왕이 세워 서기전 1046년까지 존재했던 왕조로 마지막 왕 주는 백성들을 잔혹하게 다루다 주나라의 시조 무왕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때 상나라의 기자가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조선의 왕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문화가 차지하는 큰 비중 때문에 중국의 3황5제에 기대어 가문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는 많았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인이 소호 금천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이는 김유신비나 삼랑사비문에 보인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는 고려의 왕족 또한 제곡 고신의 후예이기 때문에 고씨라고 했다는 진서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뿌리를 찾아서’에 의하면 왕건의 성씨인 개성왕씨는 황제 헌원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건국자와 나라의 정체성
이제까지 여러 건국자의 뿌리를 살펴보았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가 신라왕족의 후손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듣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그럼 금나라와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는 모두 우리 역사네.”
여기서 말하는 우리 역사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뜻하는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은 한 국가의 정체성을 그 국가를 세운 사람의 정체성으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가만해 생각해 보면 금나라와 청나라의 백성들이 과연 한민족이었던가? 그들은 옛날에 말갈족 또는 여진족으로 불려 왔고 최근에는 만주족이라 불리고 있는 하나의 독립된 민족이다. 금나라와 청나라는 그들 만주족의 나라이지 한민족의 나라가 아니다. 설사 몇 명 안 되는 왕족들이 신라 왕족의 후예라 할지라도 그들이 국가 전체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조선, 백제, 신라 그리고 발해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논리다. 요컨대 한 나라의 정체성은 건국자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계승국가와 나라의 정체성
서양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국가는 로마제국이었다. 그래서인지 로마제국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나라가 몇 나라 있었다. 바로 신성로마제국과 러시아제국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라틴계 민족이 중심이 되었던 로마제국에 비해 신성로마제국은 게르만 민족이 중심이 된 제국이었고 러시아제국은 슬라브 민족이 세운 제국이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이나 러시아제국이나 모두 로마제국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다. 로마제국의 정체성은 오늘날의 이탈리아가 이었다고 봐야 한다. 표방하는 계승국가와 그 나라의 정체성은 별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왕씨고려도 고려계승을 표방하였지만 과연 왕씨고려의 정체성은 고려일까?

 

  

 왼쪽부터 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 러시아제국

 


고려계승의 의미
신라말기에 민심이 신라왕조로부터 멀어지고 서남부 지방에서는 견훤백제가 건국되자 궁예가 나라를 세우며 내걸 명분으로는 고려계승만큼 좋은 게 없었을 것이다. 궁예의 나라를 이은 왕씨고려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지만 사실 왕씨고려는 신라의 후속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씨고려의 영토와 백성은 신라의 그것들과 일치했고 왕씨고려를 창업한 사람들도 모두 신라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왕씨고려로 하여금 신라와는 차별되는 독자적인 왕조의 정통성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왕씨고려는 고려계승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이를 얻으려 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한반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번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한민족이 전혀 엉뚱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엉뚱한 정체성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KOREA라는 영문 국호다. 이제는 본래의 민족정체성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왕건이 고려계승을 내세우며 왕씨고려를 세웠다고 해서 왕씨고려가 고려를 잇는 국가라고 하는 것은 고려가 중원에 있던 제국들에게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고려는 그 중원제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과 같은 수준의 얘기가 된다. 이것은 형식만 보고 실체를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으면서도 고려는 외교나 군사문제에 있어서 독자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국임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왕씨고려가 고려계승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왕건이 세운 왕조가 정통성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명분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신라의 영토와 백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신라의 후속국인 것이다.

 


참고한 자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19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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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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