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munications∨
 | 
Infos on Art∨
 
Kallery > _others > 
이태엽
 (trustle)
소개 | 작품 | 자료실 | 방명록
278
[신라민족론] (5)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나?
이태엽 at 2010-04-10 16:38 /
URL http://kallery.net/s.php?i=374

한반도에서는 660년부터 676년까지의 사이에 지배구조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唐)과 신라가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668년에 고려왕조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당(唐)과 신라 사이에도 전쟁이 벌어졌다가 676년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게 660년에 시작되어 676년에 마무리된 지배구조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여기서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통일인가?

 

 

 

위의 왼쪽 지도는 백제가 멸망하기 전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신라 말기의 모습이다. 이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신라는 백제의 영토 전부를 차지했지만 고려의 영토는 옛 대방 지역 정도만 차지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만 봐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더구나 676년 당시에는 옛 대방 지역도 차지하지 못했다가 이후 조금씩 넓혀나가 762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라는 고려의 영토를 일부만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백성도 일부만 흡수했으며 고려의 왕조는 당(唐)에 모두 내어주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은 '3. 고려는 우리 민족인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고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기보다는 일단 당(唐)에 통합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660년에 시작되어 676년에 마무리된 지배구조의 변화는 삼국통일이 아니다.

또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은 남북국시대라는 개념과도 모순된다.

고려가 신라에 흡수되었다면 고려의 후속국인 발해가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형성하는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보다 먼저 남북국시대의 개념을 도입한 김조는 삼국통일 대신 백제병합이라는 말을 쓴다.


http://kallery.net/s.php?i=358



삼한통일인가?

앞서 삼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의미는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고 두 번째 의미는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를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다.

신라의 통일영역은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의 영역을 합친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첫 번째 의미의 삼한을 적용하여 삼한통일이라 부르는 게 타당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676년 당시에는 이미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은 없어진 지 수 백 년이 지난 후였다. 신라가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통일한 것이 아니므로 첫 번째 의미의 삼한을 적용한 삼한통일이란 표현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면 두 번째 의미의 삼한을 적용한 삼한통일은 어떨까?

두 번째 의미의 삼한은 삼국과 같은 의미다. 위에서 660년에 시작되어 676년에 마무리된 지배구조의 변화가 삼국통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미의 삼한을 적용한 삼한통일 또한 될 수 없다. 

 

 

민족통일인가?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에서 한민족은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단일정치공동체에 담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하나의 민족이었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660년에 시작되어 676년에 마무리된 지배구조의 변화는 민족을 통일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을 혼동하고 이것을 불완전한 민족통일로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쉽게 비유하자면, 한 남자가 낯선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비로소 부부가 된 것을 두고 그 남자가 자기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절대 자기 부인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또 근대 이후에 생겨난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고대역사를 바라보는 것도 맞지 않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영토와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지배집단, 특히 지배집단의 가장 최상위에 있는 왕의 소유물처럼 취급되었다. 왕은 영토에 백성들을 풀어놓고 물질을 생산하게 한 다음 그 수확물을 거둬들인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전쟁이란 그러한 영토와 백성을 놓고 다른 지배자들과 벌이는 먹이다툼에 불과했다. 이것은 아래의 예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552 북사(659) 열전 동이

문선제는 영주에 이르러, 박릉 최유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魏 북위)나라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면서, 최유에게 조칙하기를,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상황에 맞게 대응하라.”고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성(成 양원왕)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뜨렸다. 성(成)의 좌우는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를 돌려받아 복명하였다.


562-09 삼국사기(1145) 진흥왕 23년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 되었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 포로는 풀어 양인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영토뿐만 아니라 백성도 뺏고 뺏기는 쟁탈전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포로를 노비로 삼지 않고 풀어준 것이 도리어 특이한 일이 될 정도로 포로는 전리품처럼 취급되었다.

이와 같은 고대인의 관념을 인식하고 고대사를 해석해야지 오늘날의 민족주의나 기타 고대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치기준으로 고대사를 들여다보면 절대 고대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과자를 놓고 다투는 아이들의 싸움을 좌파와 우파의 대결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676년까지의 수많은 전쟁들도 그 본질을 따져 올라가 보면 결국 한반도의 영토와 백성을 놓고 신라, 백제, 고려, 당(唐) 그리고 왜(倭)까지 참여하여 벌인 한바탕의 큰 먹이다툼일 뿐이다. 여기에 동족이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은 적용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며 민족통일이라는 말은 더더욱 성립될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 몇 가지를 더 들어본다.


607-03 삼국사기(1145) 무왕 08년

한솔 연문진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또한 좌평 왕효린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라고 하였다.


608 삼국사기(1145) 진평왕 30년

왕이 고구려가 자주 강역을 침략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원광에게 명하여 걸사표를 짓게 하니, 원광이 말하였다.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나, 저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한국통일

이제 삼국통일, 삼한통일 그리고 민족통일 모두 660년에 시작되어 676년에 마무리된 지배구조의 변화와 그 의미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 변화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이 변화를 통해서 신라가 차지한 영역은 백제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백제병합이다. 다만 백제병합이란 말에는 고려왕조의 붕괴나 고려의 일부 유민이 신라로 흡수되는 내용은 표현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라, 백제 그리고 임나는 통틀어 한국이라 불렸었다. 그렇다면 이 백제병합은 562년의 임나병합에 이은 한국통일의 완성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국통일이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이때 하나가 된 영역은 옛 한국의 영역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라가 임나를 병합할 무렵에 옛 예(濊)지역도 일부 병합하였기 때문이다. 예(濊)는 한(韓)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거론된 여러 가지 명칭 중에서 그래도 한국통일이 이 변화에 가장 근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한국통일 이후 762년까지 진행된 신라의 대방지역 흡수는 영토 확장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국의 북쪽경계는 신라가 대동강까지 넓혔고 왕고가 압록강까지 그리고 이조가 두만강까지 넓혔다.



왼쪽 지도는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그리고 탁자식 고인돌의 분포도고 가운데 지도는 위만조선의 영역을 추정한 지도며 오른쪽 지도는 한국통일 직전의 한반도 지도인데 신라의 북쪽 경계는 한국통일 직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남북 고인돌의 경계, 위만조선의 남쪽 경계 그리고 한국통일 직후의 신라 북쪽 경계는 서로 가깝다.



한국통일의 배경

한국통일의 배경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먼저 백제에 대한 신라의 원한이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 주장은 아래의 기록을 예로 든다.


642-08 삼국사기(1145) 의자왕 02년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642 삼국사기(1145) 선덕왕 11년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하고는, 곧 왕을 찾아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660-07 삼국사기(1145) 태종무열왕 07년

13일에 의자왕이 좌우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신라만 백제에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제도 신라에 원한이 있었고 백제와 고려 사이에도 서로 원한이 있었다. 특히 백제와 고려는 서로 상대방의 왕을 전사시키는 극한적인 대결까지 벌였었다.


371-10 삼국사기(1145) 고국원왕 41년

백제왕(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백제 개로왕이 위(魏)에 표(表)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釗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


475-09 삼국사기(1145) 개로왕 21년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554-07 삼국사기(1145) 성왕 32년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렇게 삼국 사이의 원한관계는 항상 있어왔다. 유독 대야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생긴 신라의 원한이 한국통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마침 이때의 원한이 통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딸이 살해된 사건은 한국통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한국통일의 원인을 백제와 고려의 실정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백제의 의자왕은 주지육림에 묻혀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또 신라와 자주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여 민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경우는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횡포를 일삼다 중국과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그의 권력을 세습한 아들들 또한 서로 갈라져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백제와 고려가 망했기 때문에 부풀려진 측면이 강하다. 체제가 교체되면 새로운 체제는 구체제의 모순을 밟고 올라서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구체제의 모순을 증폭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사만 돌이켜 보아도 신라가 망하자 그 무능함과 폐쇄성이 강조되었고 왕고가 망하자 역시 그 무능함과 도덕적 타락이 강조되었다. 이조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심하게 폄하되었고 일제 또한 오늘날 우리가 국사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한 점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한국통일의 원인이라고 하는 의자왕과 연개소문의 실정 정도는 그 이전에도 많았다.


300-08 삼국사기(1145) 봉상왕 09년

왕이 나라 안의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모자라고 일이 괴로워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창조리가 시정해주기를 건의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재난이 거듭 닥쳐 올해 곡식이 자라지 않아서 백성들이 살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아이는 구렁텅이에 굴러다닙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사람들을 몰아 나무와 돌로 하는 공사에 고달프게 하는 것은 백성의 부모가 된 의미에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어 만일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잘 헤아리소서.”라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바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찬을 막으려 하시오.” 하였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인자하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시정을 건의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신(臣)은 이미 빈 국상의 자리를 승계하였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칭찬을 가로막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 말기 바란다.”고 하였다. 창조리가 왕이 고치지 않을 것으로 알고, 또 해(害)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 나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여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두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475-09 삼국사기(1145) 개로왕 21년

왕은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과 대사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 동쪽에서 숭산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처럼 삼국에는 실정을 하는 왕이나 권력자가 항상 있어왔다. 유독 의자왕과 연개소문의 실정만이 한국통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마침 이때의 실정이 통일이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자왕과 연개소문의 실정도 한국통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원한이나 실정을 통일로 이어지게 한 환경이란 어떤 것일까?

예년과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면 예년과 달라진 새로운 조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수 백 년 간 지속되었던 두 왕조가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같이 망했다면 각 개별 국가의 내부 원인이 우연히 일치했다고 보기보다는 외부의 공통된 원인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통일 직전에 외부에 형성된 새로운 환경은 바로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중국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동북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반도의 정세는 항상 중국대륙의 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왕조교체는 항상 중국대륙에서 제국이 교체될 때만 일어났다. 신라-왕고의 왕조교체는 중국대륙에서 당(唐)-송(宋)이 교체되는 시기에 일어났고 왕고-이조의 왕조교체도 중국 대륙에서 원(元)-명(明)이 교체되는 시기에 일어났다. 또 중국대륙이 분열되어 있을 때에는 한반도의 왕국이 상대적으로 강성해졌고 중국대륙이 통일되어 있을 때에는 한반도의 왕국이 위축되었다. 이것은 한(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하였다거나, 흉노족의 침략으로 진(晉)나라가 망해갈 무렵에 고려가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고 영토를 넓혔다거나 하는 예로 설명이 된다. 광개토왕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대륙이 5호16국으로 갈라져 있었던 상황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의 통일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대륙은 진(晉)나라가 316년에 망한 이후 오랫동안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동북아시아는 비교적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채 신라, 백제, 고려, 왜(倭) 등이 서로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며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589년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부터 동북아시아의 세력판도가 재편되게 되었다. 중국대륙의 통일제국은 중국대륙을 갈라서 통치하던 이전의 제국들과는 달리 한반도를 포함한 주변지역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수나라는 바로 당(唐)나라로 교체되었는데, 당나라는 신라와 손을 잡고 660년 백제를 무너뜨리고 663년 백촌강 전투를 통해서 한반도에 대한 왜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켰으며 668년에는 고려마저 멸망시켰다. 그러나 신라마저 지배하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가 신라로 통합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한반도의 주민들은 신라라는 단일정치단위에 담기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한반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일본열도는 한반도와의 연결이 끊어진 채 독자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왜(倭)는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군주의 호칭도 왕(王)에서 천황(天皇)으로 바꾸었으며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과거 왕국으로서의 왜(倭)의 역사를 제국으로서의 일본역사로 부풀렸다. 이로써 우리가 단순히 한국통일로만 알고 있는 사건이 사실은 중국대륙에서부터 시작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퍼져나간 거대한 변화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한국통일의 근본적인 배경은 중국대륙에서 통일제국이 들어선 것이고 신라가 백제에 원한을 품었다거나 백제나 고려가 실정을 했다거나 하는 일은 부차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통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3단계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관점은 TV 연속극을 보고 형성된 한국통일관이다. 이 관점은 신라와 백제의 지배세력 사이에 있었던 원한과 복수의 극적인 작용의 결과로 한국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매우 미시적이고 감성적인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관점은 국사책을 공부하고 형성된 한국통일관이다. 이 관점은 백제와 고려가 내정과 외교에 실패하고 분열해서 한국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관점은 또한 삼국사기의 관점이기도 하다.

세 번째 관점은 세계사를 공부하고 형성된 한국통일관이다. 이 관점은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변한 것이 한국통일의 배경이 되었다고 해석한다. 가장 거시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통일의 의미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김씨조선 두 나라가 각각 남쪽과 북쪽에 건국되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정통성 확보를 위한 역사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특히 고대사에 있어서 신라와 고려는 그 인상이 각각 한국과 김조로 대중들에게 비춰지게 되면서 한국은 신라정통을 주장하고 김조는 고려정통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신라의 한국통일을 ‘화랑정신으로 굳게 뭉친 신라가 온갖 고난을 헤치고 삼국으로 갈라져 있던 민족을 하나로 통일한 위대한 역사‘로 미화하였다. 그리고 한국통일을 남북통일에 투영하여 현대판 신라가 결국 현대판 고려를 흡수하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이 국가의 주요 이념으로 내세웠던 민족주의는 도리어 한국통일에까지 소급하여 적용되면서 당나라의 힘을 빌린 신라의 행위가 반민족적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이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김조의 역사정치는 고대 삼국의 대립을 현재 남북의 대립에 투영하는 것은 한국과 똑같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달라서 민족내분에 끼어든 미국과 미국을 끌어들인 한국을 비난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김조의 역사정치는 매우 손쉬운 면이 있는데 그것은 대중들의 심리를 자연스레 이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를 살펴보면 한일합방, 임진왜란, 병자호란, 몽골의 침략 등 온통 수난으로 가득하다. 

당연히 사람들은 속상해 한다.

"왜 우리는 맨날 침략만 당할까?"

그런데 한국사에도 고려가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중국의 강대한 제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거듭 물리친 부분이 나온다.

"오 대단한데. 고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침략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 신라가 해가지고..."

그리고 Korea, 왕씨고려, 삼국사기, 단군신화 등이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가 한 민족이었다는 인상을 풍긴다.

"게다가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을 배신했잖아?"

그리고 이제 고대에 있었던 삼국의 대립이 현재의 남북 대립에 투영된다.

"그러고 보니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려를 망하게 한 신라는 미군을 끌어들여 민족통일전쟁을 방해한 한국과 똑같네!"

그리고 마지막에 어떤 말을 하게 될 것인지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고 위의 흐름에 내포된 오류만 지적하기로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역시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를 하나의 민족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이점은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오류는 고려가 통일했다면 강한 민족이 되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고려가 통일을 했으면 강대국이 되었을지 아니면 거란족이나 만주족처럼 중국에 흡수되어 정체성이 사라졌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통일을 두고 벌어진 남북의 역사정치에서 김조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고려/신라 그리고 김조/한국에 대한 정서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정치적인 덧칠을 모두 뺀다면 한국통일은 한민족사의 출발점이었다는 큰 의미가 있다.

삼한시대의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는 각기 전성기가 있었지만 한국통일 이전까지는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들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 나라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말기의 후삼국은 불과 35여 년 만에 재통합되었는데 이것은 한국통일 이후 200여 년 간에 걸친 동질화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동질화의 결과로 삼한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겨난 것이다. 통합의 여진은 500여 년이나 지난 왕씨고려의 말기까지도 이어져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의 부흥운동이 모두 일어났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이내 진압되었고 그 후로는 고대국가의 부흥운동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통합에 대한 여진이 오랜 기간 지속된 것은 통합 이전의 삼국이 이질감이 강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갈수록 여진의 진폭이 줄어든 것은 동질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통일은 그 동질화의 첫 출발점이었다.

인류사회의 구조를 민족 간의 대립과 투쟁의 구조로 보는 민족주의는 신분제가 철폐된 근대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던 그 이전에는 계급대립의 구조였다. 그렇다면 한국통일에 대한 해석도 계급대립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한국통일에 이르는 과정은 한반도의 영토와 백성을 놓고 벌어진 여러 통치 집단 사이의 거대한 먹이다툼이었다. 그러나 한국통일의 결과는 착취계급의 두 무리가 몰락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었고 또 통치 집단 사이의 잦은 다툼이 사라짐으로써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한국통일은 한반도 역사발전의 커다란 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한 자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18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지만원, 자작나무 1996년...
 
 이태엽 12-13 15:42 
사형제도 자체에 대해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존치할 ...
 
Introduction | facebook | Google+ |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