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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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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4) 고려는 우리 역사인가?
이태엽 at 2010-04-08 23:31
URL http://kallery.net/s.php?i=363

고려는 해체될 때 왕조와 함께 백성과 영토의 대부분이 당나라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일단 고려의 무게중심은 당나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뒤이은 발해가 고려의 백성과 영토의 상당부분을 흡수했지만 발해 또한 요나라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지금의 중국 속으로 녹아들었다. 따라서 고려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려는 그 백성과 영토의 일부가 신라에 흡수되기도 했고 또 그 활동영역의 많은 부분이 한반도에 걸쳐 있었으므로 한국사에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고려가 한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했고 한민족의 인적 구성에도 크게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민족사로 보기는 힘들다.


고려의 기원

고려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먼저 광개토왕릉비(414)에 실려 있는 고려의 건국 설화는 다음과 같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마지막 부분은 황제 헌원이 100살이 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설화와 닮아 있다.)


이 설화는 위서(554), 수서(636), 주서(636), 북사(659), 삼국사기(1145) 등에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설화는 부여의 건국 설화와 내용이 유사하다.

부여의 건국 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논형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논형(論衡 27-97?)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雞子 從天而下 我故有娠 後産子 捐於豬溷中 豬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借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掩水 以弓擊水 魚鱉浮爲橋 東明得渡 魚鱉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북쪽 오랑캐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시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의문스런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말하길,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돼지 우리에 넣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말에 밟혀 죽게 하려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는데 말 역시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천자(天子)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다. 그러나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엄수에 길이 막히자 활로 물을 쳤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군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마침내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289)와 후한서(445) 그리고 양서(636)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논형의 탁리가 각각 고리(高離), 색리(索離), 고리(櫜離)로 바뀌어 있고 엄수는 각각 시엄수(施掩水), 엄사수(掩㴲水), 엄체수(淹滯水)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부여와 고려의 건국 설화는 하백(河伯)의 외손이라는 부분만 제외하고 구조가 동일하다. 두 설화의 기록 시기를 비교해 볼 때, 고려의 건국 설화는 부여의 건국 설화를 베낀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 시기는 부여가 망한 285년 이후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고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서(漢書 82)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

현도군은 서기전 107년에 설치되었다. 고구려(高句驪)는 왕망이 하구려(下句驪)라 부르기도 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삼국지(三國志 289)

고구려(高句麗)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그리고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동이의 옛날 말에 의하면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으니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그리고 계루부가 그것이다. 본래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적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적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445)

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삼국지(三國志 289)

왕망의 초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의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侯) 도(騊)에게 전가시켰다. 엄우는,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치도록 명하였다. 엄우는 구려후(侯) 도(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한(漢) 광무제 8년(서기 32년)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으나 맥인(貊人)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처음에는 부족연맹체였다가 점차 왕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일찍부터 한(漢)나라가 현도군의 통제 하에 두려 했으나 좀처럼 제어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취할 수 밖에 없다.




고려의 정체성

한국통일 이전에는 신라와 고려가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신라와 고려가 서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은 간혹 보인다.


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449 중원고려비(中原高麗碑)

...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

(매금은 신라의 이사금, 즉 왕을 말한다.)


삼국유사(1281)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제1층은 일본 , 제2층은 중화 , 제3층은 오월 , 제4층은 탁라(托羅) , 제5층은 응유(鷹遊) , 제6층은 말갈 , 제7층은 거란 ,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

(여기서 중화는 북중국, 오월은 남중국, 탁라는 탐라, 응유는 백제 그리고 예맥은 고려를 말한다. 선덕여왕의 재위기간은 632년부터 647년까지다.)


중국은 고려가 요동 반도를 차지한 이후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고려왕에게 내린 벼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처음에는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또는 요동군공(遼東郡公)이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바뀌었다. 고려왕에 대한 호칭은 고구려왕(高句麗王)에서 고려왕(高麗王)으로 바뀌었고 때로는 요동왕(遼東王)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일관되게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435 위서(魏書 554)

위(北魏)가 연(璉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베제하였다.

435 북사(北史 659)

위(北魏)가 연(璉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제하였다.


519 북사(北史 659)

위(北魏)가 안(安 안장왕)을 진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왕(高麗王)에 배제하였다.

51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위(北魏)가 (안장)왕을 책봉하여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을 삼았다.


577 수서(隋書 636)

련(璉 장수왕)의 6세손 탕(湯 평원왕)이 주(北周)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무제는 탕(湯)에게 상개부 요동군공(遼東郡公) 요동왕(遼東王)을 제수하였다.

57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평원왕이 사신을 주(北周)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주의 고조가 왕에게 벼슬을 주어 개부의동삼사 대장군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624 구당서(舊唐書 945)

당(唐)이 건무(建武 영류왕)를 상주국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高麗王)에 책봉하였다.

62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영류)왕이 사신을 당(唐)에 보내어 역서를 나누어 줄 것을 청하였다. 형부상서 심숙안을 보내 왕을 책립하여 상주국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국왕(高句麗國王)으로 삼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상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이를 들었다.


643 신당서(新唐書 1060)

황제의 편지를 주어 보내 고려를 나무라고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벌써 신라의 두 성을 탈취하였다. 현장이 태종의 유지를 알리자, “지난 날 수(隋)의 침략을 받았을 적에 신라는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갔소. 다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현장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요동(遼東)은 본시 중국의 군현이지만 천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644 신당서(新唐書 1060)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며, “요동(遼東)은 옛 중국 땅이며 도적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였으므로 짐(朕)이 친히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 곧 포(布)·속(粟)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낙랑고려(樂浪高麗)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려의 풍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결혼

삼국지(289)에는 신랑이 폐백을 바치고 신부의 집에서 동거하다 아들을 낳으면 가족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445)에도 동일한 내용을 요약해 놓았는데, 후한서는 기본적으로 220년에 망한 한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에 당대의 모습을 그렸다고 보기 힘들다.

수서(636)와 북사(659)에는 남녀가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고 되어 있고 양서(636)와 남사(659)에는 연애를 자유로이 한다고 되어 있으며 수서(636), 주서(636), 북사(659) 그리고 신당서(1060)에는 신랑이 폐백을 바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다만 수서(636)와 북사(659)에는 신랑이 돼지고기와 술을 보낸다고 되어 있다. 수서 이후의 사서는 대체로 수서의 기록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2. 장례

삼국지(289)에는 결혼 직후부터 수의를 준비하고 장례에 재물을 많이 쓰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변에 심는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445)와 양서(636) 그리고 남사(659)에도 동일한 내용을 베껴 놓았다. 다만 양서(636)와 남사(659)에는 '곽을 쓰지만 관은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수서(636)에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 부모 및 남편의 喪에는 모두 3년 服을 입고 형제의 경우는 3개월간 입는다. 초상에는 哭과 泣을 하지만 장사지낼 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한다. 매장이 끝난 뒤 죽은 자가 생존시에 썼던 의복과 차마를 모두 거두어다 무덤 옆에 두는데 장례에 모였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가져 간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은 북사(659)에도 베껴져 있고 신당서(1060)에는 상복에 대한 풍습만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3. 제사

해마다 10월이면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이야기는 삼국지(289)부터 시작해서 신당서(1060)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 삼국지(289)에는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지낸다고 하고 후한서(445)에는 귀신(鬼神)·사직(社稷)·영성(零星)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는데 구당서(945)와 신당서(1060)에 와서는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기자신(箕子神)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변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를 보면 고려는 독자적인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건국 신화는 중원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기자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국조가 두 사람 존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초기에는 기자 숭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고 사서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을 거쳐 낙랑이 되었다. 그 낙랑을 고려가 313년에 병합하고 427년부터 도읍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낙랑의 기자 숭배가 고려의 풍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결혼과 장례의 풍습에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도 낙랑으로의 천도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국호가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뀐 것도 이즈음부터고 고분 벽화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한(漢)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중원의 무덤벽화는 한(漢)의 쇠퇴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북중국과 요동에서는 오히려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고려의 벽화무덤은 현재까지 10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대동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중류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축조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연(燕)나라 출신 동수의 묘로 357년에 만들어졌고 옛 대방 지역에 위치해 있다. 고려의 무덤벽화에 나오는 수렵도, 씨름도, 사신도, 삼족오 등은 모두 중국에서 그 소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벽화무덤은 발해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신라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해체과정

먼저 고려패망 이후 고려왕조의 지배세력이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자.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은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자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실권이 없었던 왕으로 평가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사평태상백'의 작위를 받았다. 677년에는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해져 요동으로 돌아왔으나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682년에 죽어 위위경으로 추증되었다. 당나라는 686년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고 698년에는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에 봉해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699년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그 이후에는 안동이 점차 나라를 이루어 818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치기도 했다.

고려말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자 대막리지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지방을 순시하던 도중에 동생들이 정변을 일으켜 평양을 장악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이자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거듭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이에 연남생은 휘하의 국내성 등 6개성의 백성과 당나라 군사에 의하여 공략된 3개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그들과 합세하였다. 당나라는 즉시 그를 ‘사지절요동대도독 상주국현토군개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하고 고려 정벌군의 앞잡이로 내세워 평양성을 함락시킨다. 그 공으로 그는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제수되고 변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하여진다. 그 뒤 당나라의 수도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당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자 677년 그 관리로 임용되어 일하다 679년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산은 대막리지였던 형 연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틈을 타 작은 형 연남건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 연헌충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연남생이 당군의 앞잡이가 되어 평양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였다. 그 뒤 당나라로부터 사재소경에 봉하여지고 당나라의 수도에 거주하였었는데 작위는 요양군개국공에 이르렀다.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은 아버지가 고려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당나라는 그런 그에게 우무위장군이란 직함을 내리고 수레, 말, 비단 및 보도를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낸다. 이후 평양성이 함락되자 연헌성은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우림위를 겸하였다. 그러나 후일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만다. 측천무후가 뒷날 그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을 추증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개장하였다.

이렇게 당나라에 흡수된 연개소문의 후손들은 모두 성을 '연(淵)'에서 '천(泉)'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당나라 초대 황제 이연(李淵)과 글자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천남생, 천남산 그리고 천헌성의 무덤은 모두 낙양에 있다.

요약하면, 고려 왕조를 구성했던 지배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고려가 패망한 이후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사서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패망 당시 176성 70여만호가 있었는데 당나라는 이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재편하고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괄하게 하였다. 도호에는 설인귀 장군을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다스리게 하였고 고려의 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 자사 및 현령의 관직을 주어 당나라 관리와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려인 2만 8천호는 중국 내지인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이후 겸모잠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으로 옮기고 보장왕을 데려다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삼아 남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내지로 이주시킨 고려인도 돌려보내주었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자 그를 귀양보내고 고려인들도 하남과 농우로 이주시켰다. 다만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안동에 머무르게 하였다. 돌궐과 말갈로 흩어진 고려인들도 많았다. 


중국의 광명일보가 고려의 패망이후 주민들의 이동을 추정한 자료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그 자료를 보면 고려인의 3/5은 당나라로 흡수되고 1/5만 신라로 온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의 인적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려는 원래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 처음에는 부여의 남쪽, 조선과 예맥의 북쪽 그리고 옥저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맥인(貊人)이라 여겼다. 나중에 고려는 옛 낙랑이 있던 곳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낙랑은 원래 조선이었는데 한(漢)나라에 병합되면서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살았었다. 이런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의 종족적 정체성이 어느 한 종족으로 규정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 8백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고려가 존속하면서, 그 내부에 왕국의 주도세력을 중심으로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새로운 종족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학자들은 이들을 ‘구려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는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 고려인을 중심으로 주변의 말갈, 한(韓), 거란 등 여러 종족의 일부를 포함하는 다종족국가가 되었다.

다시 중국학자들이 추정한 내용으로 돌아가서, 패망 당시 고려에는 69만여 호가 있었는데 이중 15만여 호가 고려인이었던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추정했다. 인구로는 70여만 명이 된다. 이 70여만 명 중 30여만 명은 당나라 내 각지로 흩어지고 10여만 명은 신라로 왔으며 10여만 명은 말갈로 갔고 1만여 명은 돌궐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20여만 명은 유민이 되어 흩어지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고려인의 1/5정도만 신라로 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수치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인의 일부만 신라로 왔다고 하는 경향은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인이 당나라로 많이 흡수되었다는 사실은 당나라에서 큰 활동을 했던 고려의 후예들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구당서(945)와 신당서(1060)에는 고려의 후예로서 당나라에서 큰 족적을 남긴 고선지, 왕모중, 왕사례, 이정기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모두 당나라에서 출생했고 대부분 당나라 장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군문에 들어갔다.

고선지는 당나라 장수 고사계의 아들이다. 747년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티벳의 군사기지인 연운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소발율국의 수도 노월성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차단하였다. 750년에는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을 토벌하고 그 나라의 국왕을 포로로 잡아왔다. 751년에는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연합하여 쳐들어오자 7만의 정벌군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자 이을 평정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누명을 쓰고 참수되었다.

왕사례는 당나라 장수 왕건위의 아들이다. 755년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사공에 이르렀다.

왕모중 또한 당나라 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의 책사로 활약했으나 훗날 처형되었다.

이정기는 당나라로 이주한 고려 사민의 후예다. 안사의 난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이 되었다가 765년에는 고종사촌형인 절도사 후희일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전쟁이나 반란군 토벌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공을 세우면서 15주를 차지하는 큰 세력이 되었고 778년에는 당나라 황실의 호적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781년 그가 죽었을 때에는 관직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사도태자태보동 중서문하평장사’였는데 이 직위는 그의 아들 이납에게 이어졌다가 792년에는 이납의 아들 이사고에게 이어졌고 806년에는 이사고의 동생 이사도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사도는 당나라 조정과 대립하다 819년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고려가 패망했을 때 고려의 영토는 누가 차지했는지 살펴보자.

 

 

 

위의 두 지도를 보면 고려가 해체될 때 신라가 차지한 고려의 영토가 얼마나 작았던가 하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지도에 나와 있는 신라의 북방경계도 고려가 망한 후 100여년이나 지난 후의 것이다.

676년 당시에는 신라의 북방경계가 임진강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고려가 해체될 때 신라가 차지한 고려의 영토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요컨대, 임진강 서쪽 지역은 676년 이후 조금씩 확보해 간 지역이다.



고려는 한국사에 약간 걸쳐져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사기록이 시작된 이래 고려는 한(韓)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적이 없었고 또 서로 동족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또 고려의 해체과정을 보아도 왕조, 백성 그리고 영토 이 세 가지 요소 중 어느 면을 보든 고려가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볼 수 없다. 고려가 해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가 건국되고 그 발해가 고려의 유민과 영토를 상당부분 차지하게 된다. 그 발해는 요나라에 흡수되어 최종적으로는 오늘날의 중국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따라서 고려사가 한민족사(韓民族史)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사(韓國史)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려의 활동무대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더구나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도읍으로 삼기도 했으므로 고려사가 한국사에 걸쳐져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요컨대, 고려사는 한민족사(韓民族史)가 아니지만 한국사(韓國史)에는 약간 걸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는 이전의 낙랑과 이후의 발해를 잇는 요동사에 속한다.



발해는 중국사다

발해가 한국사라는 주장은 보통 이렇다.
고려가 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그 발해는 고려계승을 표방하였으며 또 망할 때 왕자 대광현과 수 만 명의 발해 유민들이 왕고로 왔으니, 결국 발해는 고려에서 나와서 왕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고려사가 한국사보다 중국사에 가깝다면 발해가 고려에서 나온 것이 큰 의미가 없게 되지만 그래도 한번 짚어 보기로 한다.
중국의 구당서에 의하면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으로 당나라의 영주에 살다가 당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699년에 진국을 세운 것으로 나온다. 이 진국은 713년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게 되면서 발해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신당서에는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족 출신이었다고 나온다. 걸걸중상은 고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 이주해 있다가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에 의해 걸걸중상은 살해되고 그 아들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이해고의 추격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진국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대조영이 고려인이었는지 말갈족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당서에는 속말말갈인이라고 나오고 구당서에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의 별종이라 했으니, 당시 고려가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말갈족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일 것이다. 설사 대조영이 고려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백성의 대부분이 말갈족이었다면 발해의 정체성은 말갈이지 고려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위만조선의 정체성이 연(燕)이 되지 못하고 온조가 부여계라고 해서 백제의 정체성이 부여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거의 모든 사서에서 발해를 굳이 ‘발해말갈’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당서(945)와 신당서(1060)는 고려, 백제 그리고 신라를 동이열전에 넣어 놓았는데, 발해말갈은 말갈과 함께 북적열전에 넣어 놓았다.
발해는 926년 요나라에 병합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민이 왕고로 유입되었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은 수 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934년에 왕고로 망명하였는데 왕건은 그들을 환대하고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박옥걸 아주대 교수는 왕고시대에 귀화해 온 외부사람들을 출신별로 분류했는데, 발해유민은 12만여 명, 여진족은 10만여 명 그리고 몽골인은 1만여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발해가 왕고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대부분은 요나라의 귀족과 관리로 편입되었고 국토의 대부분과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백성의 대부분도 요나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할 때는 이러한 제3국으로의 소수 이탈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백제가 망할 때는 백성 12,000명이 왕과 왕족 그리고 고관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그렇다고 백제는 당나라로 계승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고려가 망할 무렵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고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이끌고 666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는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669년에 고려 주민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고려는 신라로 계승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는 전체의 흐름에 비한다면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발해는 말갈족의 왕국이며 요나라를 거쳐 오늘날의 중국 속으로 녹아들었으니 중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 물론 발해도 영토의 일부가 현재 한민족의 영역에 걸쳐 있고 일부 주민들이 왕고로 오기도 했으므로 한국사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에 비하면 발해는 한국사에 걸쳐져 있는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



첨언

이렇게 고려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면 한국의 영문국호 Korea가 한국의 정체성과 어긋나게 된다. 물론 Korea는 왕씨고려에서 나온 말이지만 왕씨고려의 국호는 고려에서 나왔고 그 고려가 한국사가 아니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영문국호를 Silla로 바꾸는 게 어떨까 생각된다. 이것은 중국의 영문국호 China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 Qin)에서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국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는 신라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서인도 제도(West Indies)를 카리브 제도(Caribbean)로 개칭한 사례와도 맥락이 닿는다. 카리브 제도는 유럽인들이 처음에 인도의 서부로 알고 서인도 제도라고 이름을 붙였었는데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사용되어 오다 최근에 모순을 없애기 위해 개칭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은 보통 이런 반응을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논리네. 그럼 중국이 옛 고려 땅이었던 임진강 이북을 돌려달라고 할 거 아니냐?"

이것은 물론 말도 되지 않는 것이지만 의외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민족과 중국 사이의 경계는 1962년 김조와 중국 사이에 체결된 조중변계조약으로 규정되어져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일본과 청(淸)나라 사이에 체결된 간도협약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712년 이조와 청나라 사이에 합의되어 세워진 백두산정계비 등이 있지만 현재 유효한 것은 조중변계조약이다. 고려가 망한 것은 1,300여 년 전의 일이며 그 이후 국경은 무수히 변해 왔다. 1,300여 년 전의 경계를 기준으로 국경선을 정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여러 나라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참고한 자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17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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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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