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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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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신라민족론] (2)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I)
이태엽 at 2010-04-06 19:52
URL http://kallery.net/s.php?i=67

단군조선은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할 뿐 역사가 될 수 없으며 기자조선 또한 근거가 부족하여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 위만조선이 대동강 유역에서 번성할 때 한반도의 중남부에는 한(韓)이라는 별도의 사회가 있었다. 이 사회의 영역을 신라의 영역과 비교해 보면 한민족은 조선이 아닌 한(韓)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한4군과 고려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중국으로 녹아들어갔다.



기자조선 부정
기자는 기원전 1000년경에 있었던 은주(殷周)교체기의 인물인데, 그에 관한 기록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논어(論語 春秋)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殷주왕이 무도하여) 미자는 떠나고 기자는 노비가 되었으며 비간은 거스르는 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자는 “은(殷)에 세 명의 어진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戰國)
五十一年冬十一月戊子 周師渡盟津而還 王囚箕子 殺王子比干 微子出奔
겨울 11월 무자에 주나라 병사가 맹진을 건너 돌아 왔다. 왕(殷주왕)은 기자를 가두고 왕자인 비간은 죽였는데 미자는 달아났다.
十六年 箕子來朝 
(周무왕) 16년에 기자가 와서 조배하였다.

상서대전(尙書大傳 戰國)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既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무왕은 은(殷)을 이기자 공자 녹부에 이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언짢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조선을 그의 영지로 내려 주었다. 기자는 이제 주나라로부터 영지를 받았으니 신하의 예의를 안 지킬 수가 없어 무왕 13년에 배알하러 왔다.
(녹부는 殷주왕의 아들이다. 자신이 섬기던 왕에 의해 투옥되었던 기자는 자신이 몸 담았던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오히려 그 왕조체제를 무너뜨린 나라에 의해 자신이 석방되는 상황을 매우 비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기(史記 BC 91)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이에 무왕이 곧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는 아니었다. 그 후 기자는 주나라에 배알하고 옛 은나라의 유적을 지나게 되었는데 궁궐이 무너지고 그곳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하여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그런 일은 부인들이나 하는 거라 시만 한 수 지어 읊었다.

한서(漢書 82)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谷償 相盜者男沒入為其家奴 女子為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은(殷)이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예의, 농사, 양잠 그리고 길쌈을 가르쳤다. 낙랑조선 사람들이 금지된 8가지 조항을 어기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해야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데 죄를 면하려면 50만을 내야 했다.

위략(魏略 三國)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禮)가 말리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燕)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否)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제(齊)·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準)에게 망명하므로 준(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燕)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간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명이 되겠다고 준(準)을 설득하였다. 준(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圭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準)을 공격하였다. 준(準)은 만(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한(韓)씨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의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논어에서 단순히 '기자라는 인물이 은(殷)이 망하기 전에 떠났다'고 한 이야기가, 죽서기년에서 '나중에 주(周)에 조배를 왔다'는 이야기로 발전했으며,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떠난 곳이 조선이며 周무왕이 그곳을 봉지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로까지 발전시켜 놓았다. 나아가 한서에서는 기자가 범금8조로 조선을 다스렸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졌고 위략에서는 위만에게 쫓겨난 조선왕을 그의 후손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야기에 살이 붙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기자가 살던 시기에는 종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대나무 등에 기록되어 전해졌고 이마저 오랜 세월에 걸쳐 옮겨 적는 과정에서 내용이 변질되었을 것이다.
논어는 서기전 479년에 죽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공자의 제자와 문인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내용도 후대에 추가된 것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으로 불리다 전한때 논어로 고착되었고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된 것은 후한때다.
죽서기년은 황제의 시대로부터 전국시대 위(魏)양왕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279년에 위(魏)양왕의 무덤에서 대나무에 기록된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것을 학자들이 정리하고 교정하여 책으로 편찬하였는데 이 책도 점차 흩어지고 분실되어 남송시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심약의 주가 붙은 금본죽서기년이 있는데 이는 명나라 때의 위작으로 간주된다. 1917년에 왕국유가 고서에 인용된 기록을 모아 고본죽서기년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자 이야기가 없다.
상서는 공자가 고대 국가들의 정치에 관한 문서를 모아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크게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 그리고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불타 없어진 것이 많아 漢문제가 복생에게 사람을 보내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것이 금문상서이다. 공자의 옛 집을 헐다가 벽 속에서 발견했다는 고문상서도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상서는 동진의 매색이 조정에 바친 금문상서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사기 이전의 기록은 전승과정이 복잡하고 진위에 대한 논란이 많으므로 여기서는 유효한 역사재료로 채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자조선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위략 부정
삼국지와 삼국지에 주석으로 삽입된 위략에는 사기와 다른 이야기가 많이 있다.
먼저 위만 이전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기(史記) 흉노열전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燕亦筑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그후 연나라에는 진개라는 현명한 장수가 있어 동호의 인질이 되었는데 동호가 그를 매우 신뢰하였다. 돌아와 동호를 침공하여 내쫓고 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 이어 연나라는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시작해서 양평에까지 이르렀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군을 설치하여 동호를 막았다. 

사기(史記) 조선열전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筑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염철론(鹽鐵論)
燕襲走東胡,辟地千裏,度遼東而攻朝鮮。 
연(燕)이 동호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천리의 땅을 개척했다. 또 요동을 지나 조선을 공격했다.

위략(魏略)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연(燕)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연나라의 침공에 대해, 사기는 연나라가 관리를 두어 보루와 요새를 쌓을 만큼 조선을 강하게 복속시켰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해, 위략은 조선이 단지 영토만을 상실했을 뿐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연나라의 침공은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먼저 동호를 침공하여 요동까지 차지한 다음 진번과 조선을 침공하여 복속시킨 것이 된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요동을 빼면 동쪽으로 2천여 리의 공간이 나오기 힘들다. 더구나 사기에는 조선이 예맥 및 진번과 같은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어 요동을 뺀 공간을 이들 나라들과 분할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므로 조선의 영역으로 가능한 공간은 더 줄어든다.
위략과 삼국지에는 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위만에 쫓겨난 조선왕이 준(準)이며 한국으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삼국지(三國志 289)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준왕은) 그의 가까운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그 뒤 준(準)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위략(魏略 曺魏)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사칭하였다. 준(準)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잠부록에서 기원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잠부론(潛夫論 後漢)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그후 한서도 역시 한(韓)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위만의 침공을 받아 바다 가운데로 옮겨갔다.

만(滿)의 성을 위(衛)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도 잠부론이다.
위략은 훗날 나온 후한서의 기록과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20년과 23년 사이에 진한의 염사착(廉斯鑡)이 낙랑에 투항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정에서 낙랑의 한인(漢人) 천여 명이 한국에 붙잡혀 노예로 지내는 사실이 드러나 이들이 낙랑에 의해 풀려나며 한국인 15,000명이 보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이렇게 나온다.

후한서(後漢書 445)
44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후한서는 한(韓)에 대해 삼국지의 기록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삼국지에 없는 내용이다. 삼국지에는 앞서 말한 위략의 이야기가 주(註)로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후한서의 저자가 염사착의 이야기를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사기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조선에 대해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사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위만이 조선을 세운 시기가 서기전 195년 직후고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병합한 때가 서기전 108년이니 서기전 145년경에 출생하여 서기전 8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천은 위만조선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사기는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착수한 편찬 작업을 그가 이어받아 서기전 91년에 완성한 것이니 더욱 더 위만조선과는 동시대의 기록이 되는 셈이다. 사마천 개인의 성향도 한나라 무제의 분노를 사 거세를 당할 정도로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역사기록에 있어서는 매우 엄정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따라서 사기와 위략이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기의 기록을 우위에 두기로 한다.
여기서 사기의 조선열전에 나오는 내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사기(史記 서기전 91) 조선열전
朝鮮王滿者故燕人也
조선왕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筑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秦滅燕屬遼東外徼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요동 변방에 소속시켰다.
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조선에 접한 중국은 연나라, 진나라 그리고 한나라로 왕조가 바뀌었는데 그 관계가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때 요동과 조선의 경계는 패수였는데 이것은 이전 진나라 때보다 국경을 물린 것이다. 진나라 때는 조선이 요동 외요에 소속되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외요는 진나라의 간섭을 받는 지역을 말한다. 이것은 이전 연나라 때 관리를 두고 보루와 요새를 쌓은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한나라가 포기한 조선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중국의 난민들이 몰려와 살았다.

한민족의 바탕은 한(韓)
조선이 존재할 당시, 한반도의 중남부에는 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별개의 사회가 있었다. 
이 진국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사기(史記 서기전 91)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위만조선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서(漢書 82)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 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위만조선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과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위략(魏略 三國)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相) 역계경이 우거에게 충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 289)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는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는 왜와 접해있어 사방 4천리다.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辰王治月支國。
진왕(辰王)은 (마한의 50여 나라 중 하나인) 월지국을 다스렸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그(진한과 변한) 중에서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사기의 기록은 眞番旁衆國(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인지 眞番旁辰國(진번 이웃의 진국)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사기에서 한서로 이어지는 기록의 전승과정에서 착오로 진국(辰國)이란 말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이때 생겨난 진국 때문에 후대에 진한(辰韓)이니 진왕(辰王)이니 하는 말들이 만들어졌을 수 있다. 
또 거꾸로 진한이나 진왕이란 존재 때문에 진국이란 말이 사서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진한이나 진왕의 존재는 당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이라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다. 이 진한과 진왕이 사기에서 한서로 이어지는 기록의 전승과정이나 같은 사기나 한서 내에서 후대의 판본으로 이어지는 기록의 전승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삼국지와 위략은 진국에 관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삼국지는 먼저 진한이 옛 진국이라 하고 진한 사람들은 원래 진(秦)나라에서 한국으로 흘러온 유민인데 마한이 땅을 떼어주어 살게 했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진나라 이전에 진국은 한국이 된 것처럼 기술해 놓았다. 그런데 위략에는 위만조선의 역계경이 왕과 불화가 생기자 진국으로 망명했다고 되어 있다. 위만조선은 진나라가 망한 후 생겨난 나라다. 진나라 이전에 없어진 진국이 진나라 이후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든 진국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지만 한(韓)이라는 존재가 조선과 별도로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진국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진한(辰韓)이 되었다고 하므로 여기서는 사서에서 진국이라고 표현한 것도 한(韓)의 개념에 포함시키기로 한다.


왼쪽 지도는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그리고 탁자식 고인돌의 분포도고 가운데 지도는 위만조선의 영역을 추정한 지도며 오른쪽 지도는 한국통일 직전의 한반도 지도인데 신라의 북쪽 경계는 한국통일 직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왼쪽 지도의 '고조선의 문화 범위'라고 되어 있는 영역은 요동사의 초기 무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고인돌,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고인돌은 요하 이동에서 출토되는데 한강 이북에는 탁자식이고 한강 이남에는 바둑판식이다. 동검은 처음에 비파형이었다가 나중에 세형으로 발전하였는데 비파형 동검은 요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세형 동검은 청천강 이남에서 출토된다. 반면 미송리식 토기는 청천강 이북에서 출토된다.
청동기 시대의 고고학적 양상을 볼 때 조선의 남쪽에 있었다던 한(韓)은 바둑판식 고인돌의 분포 지역에 대응시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면 한(韓)의 북쪽 경계는 훗날 신라의 북쪽 경계와도 유사해진다. 신라는 왕고와 이조를 거쳐 오늘날의 한국으로 이어졌으니 한민족의 뿌리는 한(韓)이 되고 조선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학교에서 국사를 배우면서 누구나 느꼈겠지만 조선에서 삼한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이 뭔가가 비어있는 거 같고 매끄럽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 같다.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조선과 고려 사이에 무려 400여년이나 존재했던 낙랑을 빼먹었기 때문이고 매끄럽지 못했던 이유는 반도 북부에 있던 조선과 반도 남부에 있던 한(韓)을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조선-낙랑-고려로 이어지는 북부와 한(韓)-신라로 이어지는 남부로 분리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말끔히 해소된다.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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