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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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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신라민족론]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III)
이태엽 at 2010-04-05 11:56
URL http://kallery.net/s.php?i=358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요컨대, 임진강 서쪽 지역은 676년 이후 조금씩 확보해 간 지역이다.

벽화고분은 중국에서 전래된 문화이고 신라나 백제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국통일 당시 신라는 고려의 벽화고분이 출토된 지역을 거의 차지하지 못했고 고려에서 벽화고분을 만들 수 있는 계층은 대부분 당(唐)으로 이주하였다.


한민족의 북방이주
한민족은 한국통일 이후 일조시대까지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로 꾸준히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는 주로 국가가 정책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한강 하류는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는데 서기전 18년 부여의 유민이 들어와 백제를 세웠다.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가 475년 고려에 빼앗겼으며 553년에는 다시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676년에 신라가 당(唐)과의 전쟁을 끝마쳤을 때까지도 신라의 영토는 여기서 더 크게 확장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동강 이남이 공식적으로 신라의 영토가 된 것은 735년 당나라로부터 소유를 인정받고 나서부터다.

한민족의 북방이주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782년에 한강 하류지역의 주민들을 황해도 예성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평양은 901년까지만 해도 궁예가 잡초만 무성하다고 한탄할 정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는데 평양 성주 검용은 905년 궁예에게 투항하게 된다. 그리고 918년 궁예를 이은 왕건은 황폐화된 평양을 되살리기 위해 황해도 지역의 여러 고을 사람들을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993년에는 요나라가 왕고에 쳐들어오는데 서희는 그들과 협상을 벌여 왕고가 요나라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이남의 땅을 왕고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왕고는 이곳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소탕하고 요나라의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두 차례의 침략마저 물리치며 이곳을 지켜냈다. 이후 내륙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 1033년과 1078년 기록에 그 사실이 나와 있다.

1107년에는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9성을 쌓았다. 그리고 남도지방의 이주민들로 하여금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하였는데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를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곳을 방어하기가 힘들어 1109년 여진에게 모두 돌려주고 철수하게 된다.

1258년 몽골의 군대가 천리장성을 넘어 화주에 이르자 조휘와 탁정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바쳤다. 몽골은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이후 100여 년 간 함경남도 일대를 통치하였다. 1356년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이성계의 아버지 천호 이자춘의 도움으로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이 지역은 다시 왕고의 영역이 되었다.



위 지도는 왕고에서 이조로 왕조가 교체될 때의 영토를 추정한 것인데 백두산을 억지스레 끼워넣은 느낌이 있다.


왕고의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조는 영토를 북쪽으로 더욱 확장하여 지금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게 된다. 

이조는 먼저 지금의 자강도 북단에 1416년부터 1443년까지 차례로 4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야인들의 출몰이 빈번하고 방비가 어려워지자 1455년에는 3군을 그리고 1458년에는 남은 한 개의 군마저 철폐하고 이곳에 살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폐사군(廢四郡)이라 불렸는데 오랫동안 재개척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조금씩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완전한 통치영역으로 삼았다.

또 1434년부터 1449년에 걸쳐서는 함경북도 북단의 여진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하였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훗날 누르하치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로 대거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곳의 유지는 비교적 쉬웠다.

이렇게 확장된 영토에는 남부지역의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조선왕조실록의 1433년 기록에는 새로 개척된 함경북도 북단의 두 곳에 각각 1,100호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되 해당 도에서 인원이 부족하면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모집하여 채우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남부지방 주민의 북방이주가 본격적으로 이어지는데 1437년에는 충청도에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민이 그곳을 지나가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예정된 2,000여 호의 이주를 가을로 미루고 강원도와 충청도의 주민들만 봄에 이주시키기로 했다. 또 1438년 기록에는 이 해에 380여 호 5,330여 명이 이미 이주했지만 2, 3천여 명의 주민이 더 이주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있다. 1460년에는 경상도에서 2,500호, 전라도에서 1,500호 그리고 충청도에서 500호를 뽑아 평안도, 황해도 그리고 강원도로 이주시키라는 세조의 명이 있었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민에 대한 기록이 한동안 계속되는데 대체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지방관들이 관할 지역의 인구가 부족하다며 인구가 많은 경상도, 전라도 등지의 주민들을 뽑아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고 조정에서는 이에 응한다는 내용이다. 이때의 사민은 오늘날 이북에 사는 사람들이 이남의 본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열쇠가 된다.

한편, 이조말기에 이르면 이주의 양상이 다르게 변하는데 기존의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의 이주가 아니라 반도에서 대륙으로의 이주가 시작된다.

원래 백두산과 두만강은 여진족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 금(金)나라를 세웠는데 이 금나라는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중국대륙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대거 중원으로 옮겨가 중국대륙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백두산 일대를 잊지 않고 그곳을 신성시하며 보호하였다. 1677년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을 봉금지로 설정하여 한족이나 조선인의 유입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712년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이조와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이조에서도 봉쇄령을 내려 강을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한반도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가 땅을 개간하며 살기 시작하였는데 청나라나 이조나 이를 막기가 매우 힘들었다. 또 연해주를 개척한 러시아가 만주로 세력을 뻗쳐오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는 1881년 봉금령을 해제하였고 조선인의 간도이주도 묵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 통치에 반발하는 사람들과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1937년부터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의 농민들을 대거 만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연해주는 간도의 일부로 인식되어왔었으나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맺은 후부터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연해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은 1937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한편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조선족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조선족이나 고려인은 몇 대만 따져 올라가 보면 바로 경상도나 전라도와 같은 한반도 출신 조상들을 만나게 된다.

요약하면, 왕고와 이조에 걸쳐 확장된 영토인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현재 만주에 사는 조선족이나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 이 모두가 그 뿌리를 따져 올라가 보면 결국 신라인에 이르게 된다.

 

 

성씨로 가늠해 보는 한민족의 정체성
통계청의 2000년 인구통계조사에 의하면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성씨가 5개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위의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신라/임나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본관이 6개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위의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영남 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시조로 따져보게 되면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김알지와 박혁거세의 후손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래 자료는 ‘뿌리를 찾아서’에 게재되어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집계한 것이다.

 

김알지의 후손:
가평김씨, 감천김씨, 강릉김씨, 강서김씨, 광산김씨, 강화김씨, 개성김씨, 결성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고령김씨, 고양김씨, 공주김씨, 광양김씨, 광주김씨, 괴산김씨, 교하김씨, 구례김씨, 금산김씨, 김녕김씨, 김제김씨, 김천김씨, 김화김씨, 나주김씨, 낙안김씨, 대구김씨, 도강김씨, 문화김씨, 밀양김씨, 배천김씨, 부안김씨, 삼척김씨, 상산김씨, 서흥김씨, 선산김씨, 설성김씨, 수안김씨, 수원김씨, 순천김씨, 신천김씨, 안로김씨, 안동김씨, 안산김씨, 안성김씨, 안악김씨, 야성김씨, 양근김씨, 양주김씨, 언양김씨, 연안김씨, 연주김씨, 영광김씨, 영동김씨, 영산김씨, 영월김씨, 영천김씨, 영해김씨, 오천김씨, 용담김씨, 용안김씨, 우봉김씨, 울산김씨, 원주김씨, 월성김씨, 의성김씨, 장연김씨, 전주김씨, 진잠김씨, 진주김씨, 진천김씨, 창원김씨, 청도김씨, 청풍김씨, 통천김씨, 풍산김씨, 하음김씨, 희천김씨, 감천 문씨, 광산 이씨, 수성 최씨.

박혁거세의 후손:
강릉박씨, 고령박씨, 고성박씨, 군위박씨, 면천박씨, 무안박씨, 문의박씨, 밀양박씨, 반남박씨, 사천박씨, 삼척박씨, 상산박씨, 상주박씨, 선산박씨, 순천박씨, 여주박씨, 영암박씨, 영해박씨, 운봉박씨, 울산박씨, 월성박씨, 은풍박씨, 인제박씨, 전주박씨, 죽산박씨, 진원박씨, 창원박씨, 춘천박씨, 충주박씨, 태안박씨, 평주박씨, 평택박씨, 함양박씨.

 

이러한 자료들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개칭된 것이다.

신라의 한국통일은 백제병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인의 유입은 많지 않았고 백제의 왕족과 귀족은 대부분 당나라나 왜국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신라의 성만 9주5소경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러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도 스스로 성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왕씨고려에서는 개국공신들의 공로를 치하하거나 유력한 지방호족들을 포용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성씨를 나누어 주었다. 또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들이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주지의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양인들도 성씨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확산되어 간 성씨는 이조 후기에 이르러 일부 천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었다.

아래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판 한국사론에 실려 있는 조선후기 대구지방의 신분별 인구변동 자료이다.

 

1690년 숙종 16년 양반  9.2%, 상민 53.7%, 천민 37.1%
1729년 영조  5년 양반 18.7%, 상민 54.7%, 천민 26.6%
1783년 정조  7년 양반 37.5%, 상민 57.5%, 천민  5.0%
1858년 철종  9년 양반 70.3%, 상민 28.2%, 천민  1.5%

 

이 자료를 보면 조선후기에 들어와 천민들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유독 대구뿐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천민들의 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곧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 성씨를 만들어 쓰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기존의 명문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가문의 성씨인데 그 많던 천민들이 대부분 자손을 낳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조말기까지도 남아있던 소수의 성씨 없는 사람들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의 시행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때 새로 성씨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행정기관의 서기나 경찰이 지어준 성씨를 쓰기도 하고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씨를 따르기도 했으며 아무런 연관이 없는 유명한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쓰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다. 이 창씨개명은 1940년 2월에서 8월 사이에 신청을 받았는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유무형의 불이익이 주어졌기 때문에 조선인 가구의 약 80%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6년 미군정은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을 모두 원래의 성씨로 복귀하게 하였다. 

이러한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썼더라도 여러 세대를 이어오며 그 성씨를 사용하고 소속감을 느껴왔다면 그 성씨의 사람이라고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흑인과 백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흑인과 백인의 유전자를 반반씩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이는 흑인의 외모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흑인으로 여길 것이고 스스로도 흑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정체성이란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유전자와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써서 혈통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조상 중 누군가가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면 상황이 좀 달라질 수는 있다. 근래에는 Y-DNA분석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자신의 부계혈통이 성씨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성씨에 대한 소속감에 큰 변화가 올 거 같지는 않다. 이것은 민족에 대한 소속감으로부터 추정해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성씨 중에는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왔다는 유래가 분명한 성씨가 많다. 중국, 여진, 일본 심지어는 월남도 있다. 그러나 그런 성씨의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한족, 만주족, 일본인 또는 월남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를 이어 한민족공동체에 섞여 살면서 정체성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성씨에 대한 소속감도 마찬가지다.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썼더라도 여러 세대를 이어오며 그 성씨를 사용하고 소속감을 느껴왔다면 그 성씨의 사람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한 사람의 성씨에 대한 정체성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씨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성씨가 모이고 모여 통계청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어떤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성씨의 통계가 보여주는 경향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그 의미를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신라/임나계 성씨와 영남 지역의 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이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여기서 잠깐 성씨를 화제로 삼은데 대해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해소하고자 한다.

우리 조상들은 가문을 중시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봉건시대의 가치관에 의한 것이므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의 가문보다는 그의 인간성과 사회적 역할을 가지고 평가한다. 인간(人間)이라 함은 사람들 틈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 틈에 사는 사람으로서 개인은 마땅히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을 보통 인간성이라고 한다. 또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 물질을 필요로 하는데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물질의 생산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한다. 이것을 보통 사회적 역할이라고 한다. 노비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물질과 용역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양반들보다 더 생산성이 떨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치관에 의한다면 가문은 자긍심이나 수치심과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행위도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한다면 못마땅한 일이 될 수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좋은 가문의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돌아왔다. 당연히 그런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유력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조선인의 80%가 창씨개명을 한 이유와도 동일하다. 오늘날 유력가문이라고 자부하는 성씨도 일제시대에는 대부분 창씨개명을 했었다. 또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행위는 일반 민중들뿐만 아니라 왕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중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유력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데 비해 그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주로 중국 3황5제의 후손을 자처했다. 왕씨고려같은 경우는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다 원나라에서 왕이 수모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이러한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화석연료 덕분에 난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들이 왜 귀중한 자연을 훼손하며 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썼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성씨문제를 고찰한 것은 성씨를 통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왕고와 이조시대의 다문화

한민족은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단일정치단위로 통합한 뒤 형성된 민족이다. 그러나 한국통일 이후에도 왕고와 이조시대에 걸쳐 외부의 유민들이 간헐적으로 섞여 들어왔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백정과 향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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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白丁)은 원래 양수척(楊水尺)이라 불렸었는데, 화척(禾尺) 또는 수척(水尺)이라고도 하였고 무자리라고도 하였다. 그 기원은 왕씨고려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16 고려사절요(1452)

일찍이 이의민의 아들 지영이 삭주분도 장군으로 있을 때에 양수척이 흥화와 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지영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본래 부역이 없으니 나의 기생 자운선에게 소속시키겠다.”하고, 드디어 그 이름을 등록하고 계속 공물을 징수하였는데 지영이 죽자 최충헌이 또 자운선을 첩으로 삼고 인구를 계산하여 공물을 더욱 심하게 받으니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하였다. 거란의 군사가 이르자 양수척이 맞아들여 항복하고 길을 인도한 까닭으로 산천의 요충지와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민으로 본래 관적과 부역도 없었다. 수초를 따라 옮겨 살면서 일정한 거주가 없이 다만 사냥을 일삼고 또 고리(유기)를 엮어 이를 판매하여 생업을 삼았다. 기생들은 본래 유기를 만드는 장인의 후예다.

(삭주는 오늘날의 평안북도에 있는 지역이다. 견훤백제는 936년 왕고에 병합되었다.)


1469 조선왕조실록

공조 판서 양성지가 상서하였는데, 

“...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이라는 것은 전조(왕씨고려)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갔을 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과 백정은 충렬왕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현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풍습과 가축을 잡는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

(양수척이 백정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423년의 일이다.)


양수척의 기원은 왕고의 지배체계에 정상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견훤백제의 유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고시대에는 거란장이라는 것도 있었다.


1219 고려사절요(1452)

합진이 부녀자와 사내 아이 7백 명, 우리나라 백성 중에 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자 2백 명을 우리에게 돌려보내고, 15세 내외의 여자 9명씩과 준마 9필씩을 조충과 취려에게 각각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조충이 거란 포로를 각도의 주와 현에 나눠 보내서 빈 땅을 골라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백성이 되게 하니, 이것이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란 것이다.

(이 기록은 몽골과 왕고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한 후 그 뒤처리를 하는 과정이다. 합진은 몽골의 장수이고 조충과 취려는 왕고의 장수들이다.)


거란장은 말 그대로 거란의 유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성호사설에는 거란의 유민들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들도 이 거란장에 살았다고 하였다.


성호사설(1740)

발해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거란이 망했을 때도 그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것을 거란장이라 하므로 서쪽 사람들은 대체로 건장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여 옛날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다.

(발해는 926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망했고 요나라는 1125년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망했다.)


패망한 나라의 유민들이 대개 다른 나라에서 천대를 받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거란장에 살았던 사람들도 양수척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달단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런 심증이 더 굳어진다.

달단(韃靼)은 몽골을 가리키던 타타르(Tatar)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지배했던 몽골은 1368년에 세워진 명나라에 의해 북방으로 밀려나고 한반도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한반도에 잔류한 몽골족이 있었다. 


1421 조선왕조실록

황해도와 평안도에 수유적(酥油赤)이 있는데, 스스로 달단의 후손이라 하면서 도축으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 각 집에서 해마다 수유 한 정(丁)을 나라에 바치면 더 이상 부역이 없으므로 군역을 피하는 사람이 많이 가서 의지하였다.

(수유는 가축의 젖에서 얻어낸 유지방으로 당시에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 달단은 자주 양수척과 묶여서 언급되었다.


1389 고려사절요(1452)

먹는 것은 백성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되고 곡식은 소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과 수척은 소를 잡는 것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에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와 군의 각 역마을마다 모두 소를 잡아서 손님을 먹여도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서북면은 오늘날의 평안도에 해당된다.)

 

여기서 농경민과 유목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농경민에게는 소가 식량을 생산하는 수단이었지만 유목민에게는 식량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양수척과 달단은 유목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양수척은 나중에 백정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는데, 달단도 이 백정이란 말에 포함되었다.
한편, 양수척은 왕고시대부터 일반 백성들과 쉽게 섞이지 못했다.

 

1382 고려사절요(1452)

양수척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를 불태우니, 판밀직 임성미 등을 보내어 쫓아 잡아서 남녀 50여명과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1392 조선왕조실록

재인(才人)과 화척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여 상시 모여서 도적질을 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 그들이 있는 주군(州郡)에서는 그 사람들을 호적에 올려 토지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주게 할 것이며, ...


재인은 광대를 일컫는 말인데 대체로 양수척과 묶여서 언급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기생이 양수척에서 나왔듯이 재인도 양수척에서 갈라져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세종은 이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백정(白丁)으로 바꿔 부르게 하였다.


1423 조선왕조실록

병조에서 아뢰기를, 

“재인과 화척은 본시 양인으로서, 하는 일이 천하고 호칭이 특이하여, 백성들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바라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점령한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사냥하는 부역과 버들그릇, 가죽제품, 말갈기, 말총, 힘줄, 뿔 등의 공물을 면제하여 그 생활을 안정되게 하고, 그 가계가 넉넉하고 무인의 자질이 있는 자는 시위패(侍衛牌)로 삼고, 그 다음은 수성군(守城軍)을 삼으며, 그 가운데에도 재주가 특이한 자는 도절제사로 하여금 재능을 시험하여 본조에 통보하여 다시 시험케 한 후 갑사직(甲士職)에 임용하고, 만약 그대로 옛날 하던 일을 계속하며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자는 법률에 의하여 죄를 묻고, 인하여 호적을 조사하여 즉시 본거지로 돌아가게 하며, 그 가운데 개인의 노비로 있는 자는 주인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도록 하소서.”

라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잘 섞이지 못했다. 그리고 백정이란 말은 재인과 달단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1456 조선왕조실록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이라 하고 혹은 재인, 혹은 달단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이라 칭하여 옛 이름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벼슬길을 열어 주었으나, 지금 오래 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습을 버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모여 혼인하는데, 혹은 도축을 하고 혹은 구걸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이전 왕조 때, 거란이 쳐들어오니, 가장 앞서 길을 안내하고 또 왜구를 가장하면서, 처음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에까지 만연하여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크고 작은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과 인척이 팔도에 연결되어 있어,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따로 한 집도 짓지 못하게 하고, 모두 갑사(甲士)·시위(侍衛), 진군(鎭軍)의 봉족(奉足)을 삼아 일일이 끼어 살게 하고, 이어서 다른 군으로 왕래함을 금하며,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혼인하거나 도축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거나 악기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전국에서 엄히 금지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가장에게 죄를 묻고 또 3대에 걸쳐 이를 어기지 않은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똑같이 호적에 편입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농업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

라 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씨왕조도 백정과 일반 백성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500여년이나 지난 일조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1923년 진주에서는 백정들이 사회적 차별의 해소를 요구하며 형평사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향화인(向化人)이라 불리던 야인(野人)과 왜인(倭人)은 비교적 쉽게 이조사회에 섞여 들어왔다.


1435 조선왕조실록

예조에서 아뢰기를,

“향화(向化)한 왜인 마삼보로가 광주 호장 이간의 양자가 되어 성을 이씨로 가칭하고는 양주의 호장 한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근을 낳았사온데, 이근이 글을 읽어 이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청하옵건대, 그의 응시를 허용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46 조선왕조실록

강석덕을 이조 참판으로, 이승손을 인순부 윤으로, 이계린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의지를 한성부 윤으로, 신기를 호조 참의로, 성봉조를 공조 참의로, 김고을도개(金古乙道介)를 첨지중추원사로, 김조를 경상도 도관찰사로, 이사임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양후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고을도개는 향화한 야인이었다.

(중추원은 왕명출납, 병기, 군정, 궁궐방어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기관이었다.)


물론 이들이 집단을 이루면 말썽을 일으킬 염려는 있었다.


1407 조선왕조실록

경상도 병마 절제사 강사덕이 각 포(浦)의 사의(事宜)를 상서하였다.

“... 향화를 자원하여 해변 각 고을에 나누어 둔 왜인과 흥리 왜인이 서로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므로 언설(言說)이 난잡하니, 장래가 염려됩니다. 바라옵건대, 육지의 먼 곳에 옮겨 두도록 하소서. ...”

그 글을 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1609 조선왕조실록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경기 감사 김신원이 올린 문서를 보니 ‘용인에 거주하는 향화인 박길상 등 10여 호의 남녀 합계 80여 명이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 큰 길 가에 거주해 살아온 것이 이제까지 7, 8년입니다. 그곳은 크고 작은 행인들이 밤낮으로 오고가는 곳인데, 길상 등이 수하 16, 18명을 거느리고 밤에 산행을 한다고 칭하면서, 어떤 자는 말을 타고 어떤 자는 걸으며 혹 활과 화살을 들거나 혹 장검과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행인이나 짐을 쫓아가 약탈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지난 봄 부터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읍내의 원전(元田)을 이유도 없이 뺏어 경작하거나 무성하게 자란 벼 곡식을 공공연히 베어가며, 수많은 우마를 멋대로 놓아서 기릅니다. 백성들의 고발장에 따라 매번 관아에서 사람을 보내어 부르면, 문득 아전을 구타하여 손을 쓸 수 없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나무하고 소먹이는 촌사람들조차 감히 혼자 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앞으로 시골의 도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 우려되니,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 고을의 향화인이 부리는 폐단이 점차 만연하여 매우 걱정스러우니, 미리 선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충청도와 전라도의 가까운 곳에 옮겨 각 고을에 나누어 둠으로써 무리를 지어 횡행하지 못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령하기를,

“향화호인(向化胡人)들이 내지에 뒤섞여 있어 끝내 점차 세력이 커지는 걱정은 예로부터 있었다. 이제 마땅히 멀리 떨어진 섬에 나누어 두어 진압하기 어려운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한다. 경기 근처에 살고 있는 종족은 점차로 딴 곳으로 옮겨라.”

하였다.



종족에서 민족으로

한국통일 이후 한반도의 주민들은 단일정치공동체에 담기게 되면서 내부적으로는 동질화가 진행되고 대외적으로는 이질화가 진행되어 점차 주변의 여진이나 왜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은 근대 이후의 한민족과 다소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류사회를 민족 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보고 민족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한반도 주민들을 '종족'이라고 표현하여 근대 이후의 한민족과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민족’이라는 단어가 종족을 가리킬 때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러한 일반적인 용법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다만 한국통일 이후의 한반도 거주민을 가리키는 말인 ‘한민족’이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만 구별해 보기로 한다.

봉건시대에는 한 나라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봉건시대, 예를 들어 이조시대에만 해도 양반과 천민은 평등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같은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양반이 느끼는 조선에 대한 소속감과 천민이 느끼는 그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1592-04-30(<-14) 선조수정실록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선조일행의 피란행렬)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이 기록은 조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한양진입이 코앞에 다가오자 선조가 황급히 피란을 떠나던 때의 기록이다. 체제질서에 공백이 생기자 백성들은 먼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관청부터 불사르고 궁궐과 권력자들의 집을 털어 재물을 가져가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다. 선조실록에는 궁궐을 불태우는 과정이 나와 있지 않으나 일본군이 도성에 들어왔을 때 이미 궁궐이 불타고 없었다는 이야기는 선조수정실록과 일치한다. 


1592-05-03 선조실록

적이 경성을 함락시키니 도검찰사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이 모두 달아났다.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으므로 왜적 대장 평수가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경동하여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1592-05 선조수정실록

적이 종묘를 불태웠다. 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가 그 곳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곳은 조선의 종묘로서 신령이 있는 곳이다.’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남별궁)에 이거하였다.


또 당시 이씨왕조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두 기록이 일치한다.


1592-05-14 선조실록

모여 있던 장수들의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 라고 하였고, 싸우러 가던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습니다.


1592-07-01 선조수정실록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토관 진무 국경인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대장이라 일컬으며 갑기 5천으로 진을 결성하였다. ... 경인이 마침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 여시 노비 등과 재신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속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두었다. ... 그리고 여러 진과 보의 토병과 호수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점령하게 되었다.


국경인이란 사람은 원래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던 사람인데 나중에는 그곳에서 아전으로 들어가 지내고 있었다. 1592년 왜장 가토가 함경도로 진입하자 그는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병력을 모집하러 그곳에 와 있던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 왜군에 넘겼다. 그는 왜장으로부터 회령을 통치하는 권한을 얻어 횡포를 일삼다가 이내 유생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국경인의 반란은 비단 국경인 한 사람만의 배신이 아니었다. 회령의 백성들이 동조하지 않았다면 그의 반란은 일시적으로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적이 침입해 와서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오히려 일부 백성들은 조국의 지도층과 국가질서에 대해 공격을 가했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대립구도 외에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구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구도는 신분제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씨조선의 신분제는 사람들을 귀족, 양인 그리고 천인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 천인은 가혹한 억압을 받았다. 그 천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노비였는데 그들은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고 상전이 직접 그들에게 형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노비는 신라가 통일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는데 주로 전쟁포로나 죄인 그리고 파산한 사람들이 노비가 되었다.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신라의 4개 촌락의 인구가 442명이었는데 이중 5.6%에 달하는 25명이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노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신라-왕고의 왕조교체기를 거치면서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자 호족들이 양인을 자신들의 노비로 삼는 일이 많아졌고 노비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이후에도 부모의 어느 한 쪽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된다는 규정 때문에 노비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조일전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인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호구가 100만호에 340만 명이었는데 노비는 150만 명에 달해 전체인구의 약 1/3이 노비였다. 조일전쟁이 끝나고 100여년이 지난 후인 1690년 대구지방의 호구조사를 보면 천민인구는 전체인구의 37%에 달했다. 조일전쟁은 이 두 기록의 사이에 일어났으므로 조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의 노비구성비율도 이 두 기록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조의 지배층에게는 당연히 일본군이 적이겠지만 노비들에게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상전 또한 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노비 외에도 사회적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백정이었다. 백정은 아예 조선인이라는 소속감조차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같은 조선인이면서도 서로 간에 이질감이 생기게 했던 신분제와 사회적 차별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반도에는 주민들 모두가 같은 조선인이라는 완전한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인류사회의 구조를 민족 단위의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인식하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Kim Hong-do



반만년 단일민족사의 의미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갓 해방된 대한민국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에게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민족주의 이념을 절대화하고 민족개념을 신성화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서로 다른 종족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비로소 한민족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그 신성함이 뚝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어서는 민족주의가 대중들에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되기 전의 여러 종족들도 원래는 하나였었는데 갈라져 나오는 바람에 여러 종족이 되었다는 설명이 필요했다. 마침 그런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단군신화였다. 단군을 시조의 자리에 끼워 넣고 이후의 역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일민족을 유지하며 반만년을 이어왔다고 하면 완벽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러한 역사정치를 최근까지도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곳이 바로 김씨조선이다. 김씨조선은 ‘조선민족은 한 피줄을 이어받으면서 하나의 문화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몇 천년 동안 한 강토우에서 살아온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인민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우리 민족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를 건설한 지는 벌써 60여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무대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단단한 나라가 되었다.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필요했던 절대적 민족주의와 신성한 민족개념은 이제 더 이상 한국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민족구성원들의 자유롭고 이성적인 정신세계에 방해가 될 뿐이다. 

또 요즘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일을 하고 또 많은 외국인 여성들도 한국으로 시집와서 우리의 아들딸을 낳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단일민족 어쩌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외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일을 하기도 힘들 것이고 외국인 아내가 낳은 자식들은 또래로부터 소외되어 올바르게 성장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단일민족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희석시켜야 하는 시대적 요구와도 맞지 않는다.


참고한 자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16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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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06-15 09:13 
자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흉악범...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지만원, 자작나무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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