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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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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I)
이태엽 at 2010-04-05 11:32
URL http://kallery.net/s.php?i=369

한민족은 현재 한국과 김씨조선에 나뉘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씨조선과 왕씨고려를 거쳐 신라 사람들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한국통일 이전에는 신라인, 백제인 그리고 고려인으로 갈라지고 그 사람들은 주변의 말갈족이나 왜인들과 따로 구별되는 동질성이나 동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민족의 시작은 한국통일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또 우리 민족은 통일된 신라라는 하나의 틀 속에 담기면서 비로소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므로 우리 민족을 신라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타당성이 있다.


한민족의 어원

'한(韓)'이라는 말은 원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그리고 변한(弁韓)이 있었고 이 셋을 통틀어 삼한(三韓)이라 불렀다.


삼국지(289)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그리고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대방은 대체로 오늘날의 황해도 지역으로 추정된다. 한과 왜가 접했다는 표현은 삼국지의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삼한의 첫 번째 의미다. 삼국지(289)나 후한서(445)에는 고려와 한(韓)이 별도로 기술되어 있어 고려는 분명히 이 첫 번째 의미의 삼한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삼한은 또 한국(韓國)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번째 의미다.

이 한국은 삼한에서 나온 신라, 백제, 임나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삼국지(289)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해서 우리에게 주었다.”


일본서기(720)

天皇詔田狹臣子弟君與吉備海部直赤尾曰 汝宜往罰新羅 於是 西漢才伎歡因知利在側 乃進而秦曰 巧於奴者 多在韓國 可召而使 天皇詔群臣曰 然則宜以歡因知利 副弟君等 取道於百濟 幷下勅書 令獻巧者

(463년) 천황이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길비해부직적미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징벌하라”고 하였다. 이 때 서한 재기 환인지리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한국(韓國)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환인지리를 제군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후 한국이란 말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한편, 삼한은 삼한의 한 축이던 임나가 562년 신라에 병합된 이후 점차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이 삼한의 두 번째 의미다. 이 삼한은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한동안 혼란이 있었다.


구당서(945)

(651년 의자왕에게 보내는 당 고종의 조서)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한지 오래이며, 국토가 나란히 있어 실로 개의 이빨처럼 국경이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소. 마침내 삼한의 백성(三韓之氓)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거듭되니, 짐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까워하는 바이오.


삼국사기(1145)

(692년 신문왕의 말) “우리나라의 선왕 춘추(태종무열왕)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당 태종)의 묘호와 중복되었다. 조칙으로 고치라고 하니, 내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하건대 선왕 춘추는 매우 훌륭한 덕을 지닌 분이시다. 더구나 살아생전에 김유신이라는 어진 신하를 얻어 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써 삼한을 통일하였으니(一統三韓) 그가 이룬 업적이 많지 않다 할 수 없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 馬韓 卞韓 辰韓 馬韓 則髙麗 卞韓 則百濟 辰韓 則新羅也

(최치원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 관리에게 보낸 편지)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그리고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려, 변한은 백제 그리고 진한은 신라입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 관리가 되었으나 885년 신라로 돌아온 이후 신라조정을 위해 일했다.)


이조초기 권근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고려 그리고 진한은 신라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이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 그리고 변한은 가야라는 생각은 17세기 한백겸의 주장이 통설로 굳어진 이후의 일이다.

1897년 이씨조선의 고종은 제국을 선포한다.


조선왕조실록(1897)

朕惟檀、箕以來, 疆土分張, 各據一隅, 互相爭雄, 及高麗時, 呑竝馬韓、辰韓、弁韓, 是謂統合三韓。... 朕揖讓者屢, 無以辭, 於今年九月十七日, 告祭天地于白嶽之陽, 卽皇帝位。 定有天下之號曰‘大韓’, 以是年爲光武元年, ...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으며, ...


대한제국의 국호는 삼한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국호로 정하였고 1948년에는 반도 남부에 수립된 민족국가가 이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대한민국을 간략히 한국(韓國)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두 번째 의미다.

이후 대한민국과 반도 북부에 건국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서로 정통성 경쟁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韓)'이라는 말은 반도남부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유일한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 이전에는 보통 우리 스스로를 '조선인(朝鮮人)'이라고 불렀었는데 서구에서 민족의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 한국에서는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김씨조선에서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민족의 시작과 형성

민족은 혈통, 언어, 풍습, 소속감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크게 무리지은 집단이다. 동북아시아에는 한민족, 일본민족, 한족 등의 민족이 있다. 한민족의 경우 매우 선명하게 다른 민족들과 구분이 되는데 이는 오랫동안 단일정치단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민족이란 말은 근대 이후 생겨났지만 ‘혈통, 언어, 풍습, 소속감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크게 무리지은 집단’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이것은 마치 공기란 말이 없을 때에도 공기가 있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민족이란 개념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적용될 수 있다.

반면 인류사회를 민족 간의 대립과 투쟁의 구조로 보고 민족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민족주의는 근대 이후에 생겨났다. 그 이전에는 주로 왕조 간의 대립과 투쟁의 구조였고 왕조에 대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민족주의가 생겨나기 이전의 민족을 종족이라고 해서 민족과 구별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그냥 둘 다 민족이라 부르기로 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통치를 받는 기간에 생겨났다.

그러면 한민족은 언제 생겨났을까?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은 조상이 같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여러 무리로 나뉘고 그 무리들 상호간에 이질감이 커지면서 별개의 민족으로 변해갔다. 민족의 기원이란 별개의 민족으로 갈라지는 그 분기점을 말한다. 한편 별개의 민족으로 갈라졌던 무리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합쳐지는 시점이 민족의 기원이 된다. 따라서 민족의 기원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최초로 만나게 되는 분기 또는 통합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학에서 말하는 하플로 그룹은 시차를 두고 생겨났고 이동경로도 각기 다르다. 그런데 어느 민족이든 동일한 하플로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며 대부분 여러 하플로 그룹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민족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의 민족형성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한민족은 한국과 김씨조선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민족은 곧 이씨조선 말기의 사람들에 이어진다. 민족의 영역도 이조말기의 영역과 일치한다.

이조초기의 사람들은 곧 왕씨고려 말기의 사람들이다. 이씨조선의 영역은 이 왕조기간에 조금 확장되어 두만강에까지 이르렀다.

왕고초기의 사람들은 곧 신라말기의 사람들이다. 왕고시대에도 영역은 조금 확장되어 압록강에까지 이르렀다.

신라시대에도 역시 한국통일 이후 영토가 조금 확장되어 대동강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대방지역의 주민들이 신라로 흡수되었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한민족은 한국통일 이후 신라시대, 왕고시대 그리고 이조시대를 거치면서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은 많지 않고 단지 영역만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은 곧 이조인이고 또 왕고인이며 그리고 신라인인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의 도식과 같다.


(한국인+김조인) = 이조인 = 왕고인 = 신라인


그러나 여기서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인은 한국통일 이전의 신라인과 백제인 그리고 일부 고려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더 올라가면 임나인과 예(濊)인까지 갈라진다. 그리고 한국통일 이전의 신라인, 백제인 그리고 고려인은 주변의 말갈족이나 왜인들과 특별히 구분되는 동질성이나 동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민족의 시작은 한국통일을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시대(676~900), 왕고시대(936~1392) 그리고 이조시대(1392~1910)에 걸쳐 오랜 기간 단일정치단위 속에 살게 되면서 주변의 민족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의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한국통일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통일한 영역은 대체로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의 영역을 합친 것과 같고 신라, 백제 그리고 임나는 통틀어 한국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므로 한국통일을 통해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에 '한(韓)'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통일된 신라의 틀 안에 담겨지면서 비로소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신라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좋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漢)나라를 통해서 형성된 중원의 민족을 한족(漢族)이라고 부르는 것과 맥락이 같다.

한국통일은 660년 백제 병합과 668년 고려 분할을 거쳐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완성된다.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는 한국통일이 완성된 때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1300여년이 되는 셈이다.

 

 

선사시대의 민족이동

인류는 언제 생겨났을까?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거의 일정한 주기로 발생하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면 서로 다른 두 유전자가 언제 공통조상을 가졌는지 추정할 수 있다.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는 600만년 전에 인간과 같은 조상을 가졌던 것으로 나온다. 한편 인간은 다른 원숭이류와 달리 두 발로 걷는 특징이 있는데 사하라 사막에서 발굴된 600만년 전의 해골에서 직립보행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구조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때쯤 인간의 조상이 직립보행을 하며 다른 원숭이류와 진화의 방향을 달리했다고 추정한다. 직립보행의 증거가 뼈의 구조를 통해 보다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300만년 전부터다. 그러나 뇌의 크기는 여전히 다른 원숭이류과 차이가 없었는데 200만년 전부터 뇌의 크기가 급격하게 커진 해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쯤에는 돌로 만든 도구도 발견되는데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인간의 유골이 발견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즈음부터다. 인류의 진화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인류의 이동은 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가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었다. 

현생 인류는 20만년 전에 아프리카 동부에서 생겨나 전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미리 이주해 왔던 고인류와의 혼혈도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이다. 데니소바인은 현생 인류와 100만년 전에 갈라졌으나 데니소바인의 유전자는 남태평양 원주민들의 유전자에서 적은 비율로 발견되고 아시아인의 유전자에서도 극소량 발견된다. 네안데르탈인 또한 50만년 전에 현생 인류와 갈라졌으나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는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적은 비율로 발견된다.

생활의 흔적이 많아지면서 인류의 이동은 문화의 전파와 연결되었다. 

예를 들면,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는 북유럽에서부터 시베리아와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하는데, 이를 근거로 한반도의 신석기인은 시베리아에서 이동해 왔다는 추정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이 빗살무늬토기가 반드시 주민의 이동을 통해 전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양복을 입고 있지만 서양인들이 한반도로 이주해 와서 전래된 것이 아닌 것처럼 주민의 이동 없이 문화만 전파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정신문화는 사람들이 쉽게 바꾸지 않으므로 주민의 이동과 함께 전파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물질문화는 무기나 토기와 같은 실용적인 것을 말하고 정신문화는 종교나 무덤과 같은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유럽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하는데, 이를 근거로 한반도의 청동기인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대륙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신라 이후로 한반도 사람들이 불교를 믿었지만 불교가 생겨난 인도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닌 것처럼 정신문화도 주민의 이동 없이 전파될 수 있다.

문화의 전파 이외에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나 신체적인 특성을 통해 선사시대의 민족이동을 추정해 보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면, 언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터키어, 몽골어, 퉁구스어, 한국어 그리고 일본어를 하나로 묶어 알타이어족이라고 하는데, 이로부터 터키에서 중앙아시아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이 동일계통의 민족이라는 추정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알타이어족이라는 개념에 공감하지 않는 학자들이 많이 있고 또 현재의 언어로 수천년 전의 과거를 추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이 방법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편 두개골이나 치아의 형태, 귀지의 특성, 정상 안압 녹내장과 같은 특정 질병 등 신체적 특성을 통해서 한국, 일본, 몽골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혈통적으로 가깝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대중들에게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느끼기에도 이들 지역 사람들의 생김새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과 흑인이 결혼하면 그 자손은 흑인의 외모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신체적 특성은 유전적인 혈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체적 특성을 통해서 민족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방법도 역시 미흡한 점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방법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서 민족의 이동경로를 추정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사용되는 유전자로는 부계로만 유전되는 Y chromosome과 모계로만 유전되는 mitochondrial DNA가 있다. 두 유전자 모두 여러 haplogroup으로 분류되는데 각 haplogroup의 돌연변이를 비교하면 갈라진 시기와 계통을 알 수 있다. 이 haplogroup은 민족마다 종류와 비율이 다르므로 그 민족의 지리적 위치 및 역사와 종합하면 민족의 이동경로와 뿌리를 추정해 낼 수 있다.

아래 분포도는 아시아 지역의 Y chromosome Haplogroup 분포도다.




이 분포도를 보면 파란색의 O형과 황색의 C형 그리고 초록색의 D형이 동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유형이 생겨난 순서는 C형 - D형 - O형의 순서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황색으로 표시된 C형은 아시아 북부와 남태평양으로 양분되어 분포하는데, 동남아시아에서 6만여년 전에 발생하여 이들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C형은 극동의 퉁구스족에게서 매우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데 몽골 사람들에게서도 50%가 넘는 비율로 나타난다. 중국 북부지역과 한반도에서는 10%내외의 비율로 나타난다.

초록색으로 표시된 D형은 특이한 분포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티벳과 일본열도로 양분되어 분포한다는 점이다. D형도 동남아시아에서 C형에 뒤이어 발생한 후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의 분포도로 봐서는 O형의 사람들에 의해 밀려나 오지인 티벳고원과 일본열도로 분리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열도 내에서는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D형의 비율이 높아지는데 홋까이도의 아이누인에게서 매우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O형은 D형보다 수 만 년 뒤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높은 비율로 분포되어 있다. 대만과 하이난섬은 O형의 비율이 100%에 가깝고 중국 북부와 한국은 70%정도이며 일본은 50%정도가 된다. 이 O형도 다시 몇 개의 하위 유형으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 만주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O2b형은 일본, 한국, 류큐 그리고 만주의 O형에서만 높은 비율로 존재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과 류큐의 O형은 한반도에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일본열도 내의 D형의 분포, 일본 선사시대의 역사와 함께 엮어져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일본의 선사시대는 죠몬시대에 이어 야요이시대가 이어지는데 야요이문화는 일본열도의 서부에서 시작해서 점차 동쪽으로 확산되어 갔다. 두 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골을 비교해 보면 야요이인의 신체적 특징은 죠몬인과 매우 달랐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위에서 살펴본 인류유전학의 연구결과와 종합하면, 원래 D형의 죠몬인들이 살던 일본열도에 O형의 야요이인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가 서로 섞여 일본민족을 형성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살펴본 것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줄거리가 만들어진다.

‘처음에 C형을 가진 사람들이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이동해 와서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O형을 가진 사람들이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 왔는데 기존의 C형 토착민들보다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 후 한반도인들 중 일부가 D형이 살던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일본인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Y-DNA 분석을 통하여 민족의 이동경로와 기원을 추정해 보면 한민족은 북방계 민족들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민족의 외모가 몽골이나 부리야트 사람들과 매우 유사한 점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은 MTDNA분석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

아래 그림은 MTDNA분석을 통해 추정한 인류의 이동경로이다.




MTDNA의 이동경로가 북방으로부터 한반도 방향으로 그려진 것은 한민족의 MTDNA가 북방의 시베리아나 몽골로부터 많이 유래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으로 한민족의 외모가 북방계 민족의 외모와 유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백인에 대해 흑인의 형질이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한민족에게서도 북방계 모계의 형질이 우세하게 발현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닮았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발현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선사시대에는 피정복민의 Y-DNA가 소멸되고 MTDNA만 후손에게 전해질 가능성이 높다.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방의 농경민족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지배했던 역사를 배워온 우리는 한민족의 경우도 북방계가 남방계 토착민을 정복해서 혈연적 바탕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민족에게서 북방계의 Y-DNA는 많이 검출되지 않고 MTDNA만 많이 검출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그러한 추정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것이 인류의 긴 역사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의 일로서 그 이전에는 북방이나 남방이나 모두 수렵과 채집생활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인류가 말을 타기 시작한 것도 농경보다 더 최근의 일이어서 유목민이 농경민에 대해 전력상 우위에 섰던 것이 그래 오래된 일이 아니란 점도 그러한 이해를 돕는다.

우리는 흔히 한반도의 선사시대 사람들을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북방과 연관을 지으려 하고 남방과의 연관은 애써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인돌, 난생신화, 벼농사와 같은 남방계 문화에 이어 최근의 인류유전학에 의한 연구결과는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남방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한국의 삼한시대 초기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가장 풍성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시기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삼국사기 다음으로 자세한 기록을 남긴 사서는 중국의 삼국지다. 삼국지의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오환, 선비,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濊), 한(韓) 그리고 왜(倭)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 중에서 한(韓)에 대한 설명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는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는 왜(倭)와 접해있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제국(伯濟國)을 비롯한 54개의 작은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사로국(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 된다.’

삼국지는 한(韓)에 대한 설명 중간 중간에 한국(韓國)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도 하나씩 끼워 놓았다. 그 사건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1) 진나라(秦 BC221-BC207)에서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흘러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한으로부터 동쪽 땅을 얻어 살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진한 사람들의 조상이다.

(2) 서기전 195년경 위만에게 쫓겨난 조선의 준왕은 한(韓)으로 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3) 서기전 108년 이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왕과 뜻이 맞지 않자 2천여 호를 데리고 진국(辰國)으로 이주하였다.

(4)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하였었는데, 한(韓)은 낙랑군에 소속되어 해마다 인사를 하러 왔다.

(5) 진한은 옛 진국(辰國)인데 처음에는 6개 나라였다가 나중에 12개 나라가 되었다.

(6) 204년에서 220년 사이에 한(漢)나라가 대방군을 새로 만들고 한(韓)과 예(濊)를 토벌하자 한(韓)과 왜(倭)가 대방군에 복속하였다.

(7) 237년에서 239년 사이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함께 한(韓)을 멸망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韓은 한국 전체가 아니라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인 臣濆沽國을 가리키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대방군은 204년에서 220년 사이에 설치되었다고 하므로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로 시작하는 한(韓)에 대한 설명은 중국 삼국시대 당시의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 묘사하는 한(韓)의 상황과 많은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라벌 산곡 사이에 조선 유민들이 6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훗날 진한 6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57년 6부 사람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39년에는 변한이 나라를 바쳐왔고 기원전 20년에는 호공을 마한에 보내어 독립을 통고하였다. 기원전 5년에는 동옥저가 말 20필을 바쳐왔고 37년에는 낙랑이 고려에 망하고 그 유민 5천 명이 망명해 오자 6부에 나뉘어 살게 하였다. 61년에는 마한 장군이 복암성을 들어 항복해 왔다.
기원전 18년 고려의 비류와 온조는 따르는 백성을 이끌고 한산에 와서 백제를 세웠다. 8년에 마한을 침공하여 그 중심지를 빼앗고 이듬해에 남은 두 성마저 병합하여 멸망시켰다.


삼국지는 한(韓)이 중국의 삼국시대까지도 작은 소국들이 모여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이 이야기하고 있고 삼국사기는 그보다 수 백 년 앞서 이미 삼한이 해체되고 백제와 신라 두 왕국과 가야로 재편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와 신라 모두 나라를 세운지 불과 몇 십 년이 되지 않아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흡수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자연스럽지 않다. 또 망했다던 마한이나 낙랑이 후대에 다시 등장하는 것도 매끄럽지 않다.
이 시기의 지층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양상 또한 삼국사기가 말하는 당시의 정황과 어색한 점이 있다. 당시의 지층에서 발견된 마을의 흔적들을 보면 그 이전에 있었던 청동기 시대의 마을보다 오히려 그 규모가 훨씬 축소되어 있다. 이것은 한강 이남지역이 당시에는 삼국사기가 이야기하는 정도의 왕국으로까지 발전할 조건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물론 한국에 관한한 한국의 기록이 중국의 기록보다 더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따지자면 삼국지보다 삼국사기에 더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다. 삼국지가 바다 건너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국의 이야기를 쓴 것인데 비해 삼국사기는 한국에 전해 내려오던 고기(古記), 본국고기(本國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事), 해동고기(海東古記) 등의 기록들을 참고로 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편찬 작업에는 모두 11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대표자인 김부식이 김알지 설화에 덧붙인 말을 보면 그런 전래 기록에 매우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新羅古事云天降金樻故姓金氏其言可恠而不可信臣修史以其傳之舊不得刪落其辭然
신라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전래 기록이 신뢰성이 있는지가 문제다.
한국에서 사서를 편찬했다는 기록은 백제에서 375년 기록에 처음 나타나고 신라에서는 545년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모두 중국의 삼국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다. 게다가 이 기록들은 삼국사기가 편찬되던 1145년 시기에 남아있지 않았던 듯하다. 삼국사기가 참고한 사서의 목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참고한 사서는 전승 과정이 매우 불투명한 기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중국은 서기전 91년에 사기(史記)가 편찬될 정도로 일찍부터 기록문화가 발달했고 기록의 양도 많아서 상호간의 교차검증도 더 용이하다. 거기다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는 거의 동시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의 동이전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
(245년 고려를 정벌하고 나서)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여러 가지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믿을 수 없으며 당시의 한반도 상황은 기본적으로 삼국지를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 삼국지(289)의 기록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는 근거가, 마한에 대한 설명에서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散在山海間 無城郭)'는 부분이다.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인 백제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가 기원전으로 올라가는 고고학적 양상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마한의 풍속을 설명하면서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라고 하여 성곽을 쌓는다는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한에 성곽이 없었다는 부분은 치밀하지 못한 기록의 결과일 뿐이며 심각한 오류로 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것을 들어 삼국지 기록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것이다.
진서(648)에도 마한왕과 진한왕이 289년까지 조공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던 마한과 진한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백제와 신라의 대결구도로 재편된 상황은 광개토왕릉비(414)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일본서기(720)에도 391년에 그런 상황이었다고 한다.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는 임나, 가라 그리고 안라를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로의 신뢰성을 더해준다. 그렇다면 289년에서 391년 사이의 시기에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은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로 재편되었을 것이다.
중국 대륙의 변화가 한반도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향을 생각해 볼 때, 진(晉)이 316년에 망한 상황이 삼한의 재편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낙랑과 대방이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려에 병합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의 2주갑인상처럼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도 5주갑인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망한 시기가 8년이라고 되어 있고 진서에는 마한의 조공 기록이 289년까지 나타나며 광개토왕릉비에는 391년의 기록에서 마한이 사라지고 백제가 한국의 맹주로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오류가 있었다면 5주갑 300년의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아래는 마한에 관한 기사에 이런 가정을 적용해 본 결과다.

245 이후 삼국지(289)
마한은 백제국 등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289 진서(648)
무제 태강 원년(280)과 2년에 마한의 임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하였고 7년·8년·10년(289)에도 왔다.

301(<61) 삼국사기(1145)
(신라) 마한의 장군 맹소가 복암성을 들어 항복해 왔다.

308(<8) 삼국사기(1145)
(백제)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363(<63) 삼국사기(1145)
(신라)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참고한 자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16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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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06-15 09:13 
자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흉악범...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지만원, 자작나무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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