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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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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민족론] 보통 사람이 쓴 신라민족론
이태엽 at 2010-04-01 04:47 /
URL http://kallery.net/s.php?i=361

 

삼각산 비봉에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사람들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 비석을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이 얽혀있는 비석으로 알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건국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승려다. 이중환은 1751년 펴낸 택리지에서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백운대에서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비봉에 이르러 '무학은 이곳에 잘못 찾아왔다(武學誤尋倒此)'는 글이 새겨진 비석을 발견하고는 발길을 돌렸다"고 적고 있다. 그 뒤 금석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김정희는 1816년 그 수수께끼의 비석을 찾아가서 새겨진 글귀를 해독해 보고는 매우 놀라게 된다. 그 비석은 400여 년 전에 있었던 무학대사와 관련된 비석이 아니라 1200년도 더 된 신라진흥왕의 순수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예로부터 전해들은 역사와 이야기 중에는 왜곡되거나 잘못된 것도 많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민족정체성과 관련된 다섯 가지의 착각에 대해 생각해 본다.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2.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3.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4. 고려는 우리 역사인가?

5.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나?

6. 왕씨고려는 고려를 계승하였나?

 

나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공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배운 상식적인 역사 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충분히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이 글에 사용된 자료는 전부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을 참고로 하였다. 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가리지 않고 참고한 것은 아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자료나 백과사전과 같이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만 참고했다. 참고한 자료는 여기에 모두 모아 두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를 확인해 보거나 보다 깊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싶으면 여기에 링크된 웹페이지들을 참고하면 된다. 또 이 글을 쓰면서 혼자만의 주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인터넷 역사 동호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도 하고 정보를 얻기도 했다.
이 글은 학술논문이 아니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솔직하게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 올바른 민족 정체성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에서 쓴 글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글에서 사용된 용어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하고자 한다.


역사교과서의 변천

이조말기의 역사교과서를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단군이 단군조선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는데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그리고 고구려로 이어졌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은 남쪽으로 와 마한을 세웠는데 진한과 변한을 속국으로 두었다. 이 삼한은 나중에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로 발전하였다. 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었고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3국이 대립하는 시대가 이어졌는데, 결국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신라말기에 잠깐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가 고려에 의해 통일되었는데 고려는 후에 조선으로 이어졌다.'


일조시대의 역사교과서는 고대사를 북부조선과 남부조선으로 갈라서 설명하고 있는데, 단군조선을 빼고 기자조선을 전설처럼 처리하였으며 기자조선에서 마한으로 이어지는 연결성도 뺐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가야를 임나로 교체하고 임나경영설을 반영하였다는 것이다.

미군정기의 역사교과서는 다시 단군조선을 넣었고 기자 이야기는 뺐으며 임나는 가야로 되돌렸다.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발해를 넣어 '통일신라와 발해'로 정리하였는데 7차 교육과정부터는 '남북국시대'로 바꾸었다.

 

중복되는 국호의 구별

서기전 57년 경주의 6촌장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후 사라, 사로, 신라 등으로 불리다 503년 신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신라라 불리기 이전의 시기까지 포함해서 이 왕국을 신라라 부른다. 한국통일 이후를 통일신라라 하여 이전과 구별하기도 하는데 왕조가 교체된 것이 아니므로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서기전 18년 온조는 나라를 세우고 십제라 했다가 이내 백제로 고쳤다. 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 왕국을 백제라 부른다. 900년 견훤도 나라를 세워 백제라 하였다. 사람들은 온조가 세운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견훤이 세운 백제를 후백제라 부른다.

서기전 37년 주몽은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했다. 이 왕국은 장수왕 이후 고려로 표기되었다. 901년 궁예는 나라를 세워 고려라 했다가 이내 마진, 태봉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918년 왕건은 궁예를 내쫓고 다시 국호를 고려로 되돌렸다. 이후 주몽이 세운 나라는 고구려라 하여 이 고려와 구별되었다.  

대동강 유역에는 오래 전부터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조선은 서기전 222년 이전에 연나라에 병합되었다가 한나라 때는 빈 땅이 되었다. 서기전 195년경 연나라의 위만이 이곳으로 와 왕조를 세웠는데 이 왕조 또한 조선이라 불리었다. 한편, 사기에는 서기전 1100년경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서기전 2333년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392년 고려의 왕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이성계는 처음에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다 이듬해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조선은 고조선이라 하여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되었다. 

여기서 고려와 조선은 백제와 중복 국명을 구별하는 방법이 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후대에 나온 국호에 접두어를 붙였지만 고려와 조선은 원래의 국호에 접두어를 붙이거나 초기이름으로 바꾸어 구별한 것이다. 뒤에 나온 나라가 국호의 원래 주인을 초기이름으로 되돌리거나 접두어를 붙여 밀어내고 그 이름을 차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최초로 사용된 국명이 보존되고 후대에 사용된 국명이 마땅히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또 전후(前後)나 동서남북(東西南北)보다는 왕조의 이름을 접두어로 붙이는 것이 확장성이나 고유성을 고려할 때 보다 효과적이다. 따라서 주몽이 세운 나라에게는 고려라는 정식 이름을 돌려주고 왕건이 세운 왕조를 왕씨고려라 하여 구별하여야 한다. 또 대동강 유역에 오래 전에 있었던 나라에게는 조선이라는 원래 이름을 돌려주고 이성계가 세운 왕조를 이씨조선이라 하여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단군, 기자, 위만 그리고 견훤이 세운 왕조는 왕조의 성씨가 분명하지 않거나 왕위계승이 오래 이어지지 않아 왕조의 성씨를 접두어로 붙이기가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는 창업자의 이름을 붙여 각각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견훤백제라 부를 수밖에 없다.

주몽이 세운 나라는 삼국사기(1145) 이전에는 대체로 고려라 불리었다. 삼국사기는 구당서(945)나 신당서(1060) 등의 중국사서와 내용이 동일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고려라 표기된 것을 모두 고구려로 바꾸어 표기한 점이다. 삼국사기보다 훨씬 뒤인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도 주몽이 세운 나라를 대부분 고려라 표기해 놓았다. 주몽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라 칭하게 된 것은 왕고의 의도적인 개칭작업의 결과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씨조선이란 표현에는 시비가 많다.

흔히 이씨조선이란 용어는 일제가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씨조선이란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왕위가 세습되고 국호가 ‘조선’인 왕조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이 용어 자체에는 어디에도 비하의 뜻이 없다. 다만 일제가 이씨조선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조의 부정적인 면을 주로 부각시키는 바람에 이 용어에 부정적인 느낌이 덧칠되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인상이 덧칠되어졌다고 해서 그 용어를 버리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 덧칠되어진 부정적인 인상을 바로잡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원래 이씨조선의 줄임말인 ‘이조(李朝)’는 일조시대에 독립 운동가들도 많이 사용한 말이었다.

신한혁명당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 등이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의의 소집을 제의한 문서인데, 발기인으로는 신규식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박용만, 윤세복, 조소앙, 신석우, 한진교 등 14명이 참여하였다. 그 선언의 서두에는 “대개 뭉치면 서고 나뉘면 쓰러지는 것은 천도의 원리요, 나뉜 지가 오래면 합하고자 하는 것은 인정의 율려라. 생각건대 멀리로는 3백년 유자의 당론이 이조(李朝) 멸망사의 태반을 점령하였고 가까이로는 13도 지사가 장혁이 새로운 건설의 중심을 어지럽히도다.”라는 부분이 있다.

의열단은 1919년 길림성에서 김원봉 등 13명의 독립투사들이 암살, 파괴, 폭동 등 폭력적 독립운동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 1923년 신채호는 이 의열단의 이념과 노선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천명하는데, 그 선언에는 “강도 일본의 구축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첫째는 외교론이니, 이조(李朝) 5백년 문약 정치가 '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라는 부분이 있다.

또 김씨조선에서도 이씨조선이라는 용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단순히 ‘조선’이라고 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말하는 것이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반드시 ‘리씨조선’ 또는 ‘리조’라는 표현을 써서 자신들과 구별하고 있다.

이북의 국호가 조선인 점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약칭은 공식적으로 '한국'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은 '조선'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 외에 여러 가지 호칭이 사용되어져 왔다.

조선은 냉전시대에 주로 북괴라고 불려왔다. 북괴는 '북쪽 괴뢰국'이라는 뜻이다. 괴뢰국은 실질적인 자주권이 없이 외세에 의해 조종 받는 국가를 말한다. 조선은 건국될 당시만 해도 소련의 괴뢰국이었으나 이내 자주국으로 탈바꿈했다. 또 1950년대에 이미 중국군이 철수했으니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에 비해 자주성의 측면에서는 훨씬 앞선다. 따라서 북괴란 명칭은 맞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남한과 북한이란 호칭을 많이 쓴다. 각각 '남부 한국'과 '북부 한국'이라는 뜻으로 한반도에서는 한국이 유일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국과 조선은 모두 유엔에 가입하여 세계로부터 둘 다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조선도 엄연히 유엔이 인정하는 독립국가인데 이것을 한국의 일부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조선에서는 남조선과 북조선이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 각각 '남부 조선'과 '북부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 또한 남한이나 북한과 같은 이유로 옳지 않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역사상 조선이라는 국호가 여러 번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역사를 논할 때에는 이들 ‘조선’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체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이씨조선과 같이 앞에 왕조를 표시하는 접두어를 붙여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n Empire)에서 보는 것처럼 매우 유용한 구별법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춘추전국시대의 송(宋)과 구별하기 위하여 420년 유유(劉裕)가 세운 송(宋)을 유송(劉宋)이라 하고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宋)을 조송(趙宋)이라 부르는 것을 들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한반도 북부에 있는 조선을 김씨조선이라 부르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 나라를 마치 왕조처럼 김씨조선이라 부르면 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이 표방하는 공화국은 형식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세습체제이므로 공화국 보다는 왕조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이 세습체제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김씨조선은 인민조선 또는 공화국조선으로 불릴 수 있다.

 

식민사관과 민족사관

일본의 역사 정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단계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이 역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는 한국통일, 원의 침공, 이조 침공, 명치유신 그리고 한일합방을 들 수 있다.

676년에 완료된 한국통일은 백제를 멸망시켜 일본과 한국 사이의 오랜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고 일본으로 하여금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일본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수나라의 중국통일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일본의 독자적 천하관도 반영되었다. 이 두 사서에 나타난 역사관을 기기사관이라 한다. 그 내용은 천황가의 권위를 높이고 신라를 비하하며 임나에 대한 연고권과 백제와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1274년과 1281년에 있었던 원나라의 일본 침공은 우연하게도 태풍으로 모두 좌절되었다. 이것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선민사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침공에는 왕고의 부추김이 있었고 왕고의 병력과 물자도 동원되었는데, 이것은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병합한 사실과 함께 풍신수길의 이조 침공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되었다. 1592년에 있었던 풍신수길의 이조 침공은 명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1868년에는 천황의 실권을 회복시키는 명치유신이 있었다. 여기에 맞춰 일본은 전 인민을 황국신도화하는 작업을 하고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하였다. 역량이 커진 일본은 마침내 1910년에 이조를 합병하였다. 이 합병은 반복되어 온 침공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일본은 이 한일합방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사관을 만들어 냈다. 식민사관은 한국사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성격들 중에서 일본의 한국 통치를 합리화하기에 유리한 면만 부각시킨 역사관으로 한일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일동조론은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조상이 같다는 주장이다.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은 조상이 같다. 한일동조론에서 말하는 같은 조상이란 주변의 민족들과 차별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근래에 민족분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 주장 자체로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민족과 일본민족의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된 것은 한국통일 이후이기 때문이다. 한일동조론은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다시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내선일체로 나아갔다.

정체성론은 한반도의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왔다는 주장이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전한 일본이 이끌어주면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회유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타율성론은 한민족이 역사를 주체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중국, 몽골, 만주, 일본 등 외세의 개입에 의해 타율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또한 일본의 개입을 합리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타율성론은 반도사관과 사대주의론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당파성론은 한민족이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파벌을 만들어 싸우는데 몰두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화와 당쟁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이것은 한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해 자책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오류는 성급한 일반화에 있다.

한민족사를 되돌아보면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민족사의 한쪽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일 뿐 한민족사 전체를 다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사가 서양의 역동적인 역사와 비교해서 정체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에서 왕고로의 체제교체나 왕고에서 이조로의 체제교체를 생각해 볼 때 한민족사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를 발전시켜온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당파성론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한민족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속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 사이에 대립과 분쟁이 없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은 현대에 와서 깨끗이 부정되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 초기의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5.16 과 6.29를 거치며 주체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여 지금은 세계 무대에서 선도적인 역활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천황제가 남아있는 일본을 오히려 앞서고 있다.

식민사관은 사실관계를 말하는 존재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로 구성되어 있다.

한일동조론을 예로 들면, 한민족과 일본 민족이 조상이 같다는 것은 존재이고 두 민족이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조상이 같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로 합쳐야 하는 것은 아니니, 존재는 반드시 당위로 이어진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당위 부분만을 식민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패기와 한국사의 위대함을 강조한 역사관이다. 박은식과 신채호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박은식은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라고 하여 민족사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신채호는 중세 이후 사대주의에 빠져들었지만 한민족사는 고대국가 때까지만 해도 민족적 패기가 있었다고 보았으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1천년 내 제1대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식민사관은 식민통치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민족사관은 그러한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역시 정치적인 역사관이다. 따라서 두 역사관 모두 정치적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 설득력 또한 힘을 잃게 되는 시대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반도사관과 대륙사관

반도사관은 한국의 역사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주장이다.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으로 '반도적 성격론'이라고도 한다. 한반도는 어차피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대륙세력의 가혹한 지배보다는 온정적인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일제의 한반도 통치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데 악용되었다.

대륙사관은 한민족의 역사 무대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대륙의 동부지역 그리고 일본열도까지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는 주장이다. 조선의 영역이 요서지방까지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백제의 영역이 중국대륙의 동부지역과 일본열도까지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신라나 심지어는 이씨조선의 영역까지도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대체로 사료의 한 귀퉁이에 있는 특이한 기록을 확대해석하여 근거로 삼고 있는데 유물이나 유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은 없다. 이것은 마치 돌연변이로 흰 색을 띠게 된 까마귀를 예로 들어 까마귀의 색은 희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논리학에서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남북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흔히들 반도사관은 한민족의 역사적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말하며 대륙사관의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반도사관은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한민족이 타율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반도사관은 대륙사관의 반대말이 아니다.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재야사학이란 일반적인 역사의 연구방법과 그 결과를 따르지 않고 주류 사학계가 주목하지 않는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향토사 또는 야사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류 사학계가 주목하지 않는 사료란 개인의 일기, 문집, 편지, 판결문, 신문 등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의 재료는 근래에 와서 주류사학을 보완하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재야사학의 의미가 변질되어 쓰이고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이 주류사학계에서 위서로 간주하는 서적을 절대적 사료로 내세우거나 대륙백제설이나 대륙신라설과 같이 기존의 사료에서 나타나는 사소한 의혹을 크게 확대하여 기존의 역사를 전면 부정하는 획기적인 가설을 내세우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재야사학과 구분하기 위해서 이러한 주장을 '유사 역사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강단사학은 이러한 재야사학이나 유사 역사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기존의 사학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기존의 사학계가 대부분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나온 호칭이다.
또 재야사학이나 유사 역사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강단사학, 반도사관 그리고 식민사관을 서로 연결 짓고 재야사학, 대륙사관 그리고 민족사관을 서로 연결 짓는다. 그러나 이것은 유사한 인상을 바탕으로 서로 무리를 지은 것으로 엄밀한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소지가 있다. 마치 보수와 우파를 서로 연결 짓고 진보와 좌파를 서로 연결 짓는 것과 같다. 보다 단순화시켜 비교하자면, 흑곰, 북극곰, 염소 그리고 흑염소가 있는데 색깔이 검은 흑곰과 흑염소를 하나의 무리로 분류하고 색깔이 흰 북극곰과 염소를 또 하나의 무리로 분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종으로 따지자면 흑곰은 북극곰과 같은 무리이고 염소는 흑염소와 같은 무리일 것이다.

 

유물사관과 주체사관
돌보습과 같은 석기로 농사를 짓는 것보다 경운기와 같은 농기계로 농사를 짓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생산력의 차이를 말하는 것인데 인류의 역사가 발전해 오면서 생산력은 계속 증대되어왔다. 이 생산력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대에는 생산한 수확물을 사람들이 먹고 나면 남는 게 없었지만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생산력이 증대되어 먹고도 남는 수확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을 잉여생산이라고 한다. 그러자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수확물을 뺏어먹으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계급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변해간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인간사이의 관계를 생산관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변하면 그에 맞추어 사회질서 또한 변하게 된다. 유물사관은 이처럼 생산력이나 생산관계와 같이 물질에 관계된 것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역사관이다. 사적 유물론이라고도 한다. 유물사관은 인류역사의 본질을 매우 날카롭게 꿰뚫어 본 면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발전은 물질로서만 설명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인간의 감성이라든지 그 밖의 여러 가지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역사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체사관은 김씨조선이 주장하는 주체노선의 기준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주체노선이란 모든 것을 사람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원래 김씨조선의 역사관은 유물사관에서 출발했었는데 훗날 주체노선을 표방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는 그 내용이 민족사관에 가까워진 상태다. 주체사관은 역사에 관해서 그 객관적 진실보다는 정치적 이용가치에 더 높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 길을 뚫고 임야를 개간하는 것처럼 역사 또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조하고 창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실증사학은 식민사관인가?
실증사학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과 와세다대학 그리고 조선의 경성제국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역사학을 교육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역사연구의 학풍을 말한다. 실증사학은 합리적인 사료비판과 해석을 통하여 치밀하게 문헌을 고증하고 정치나 기타 불순한 요소의 개입을 배격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실증사학에서는 '역사가는 현재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과거 사실을 보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역사를 위한 역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증사학은 20세기 초에 새로이 등장한 학풍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역사학을 근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실증사학은 역사학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학풍이 아니며 근대적인 역사학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실증사학의 흐름을 주도한 사람들 중에는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실증사학과 식민사관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역사연구의 방법론과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증사학이란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식민사관이란 재구성된 한국사를 가지고 평가하기를 ‘한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하지 못하므로 외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증사학은 역사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해당되고 식민사관은 역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해석론에 해당된다. 실증사학을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식민사관 이외에도 유물사관, 민족사관 또는 주체사관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견해로는, 역사를 재구성할 때에는 실증적 방법으로 해야 하고 역사를 해석할 때에는 유물사관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사와 국사 그리고 역사공동체

대한민국사나 중화인민공화국사라고 하면 대략 60여년이 된다. 그러나 한국사나 중국사라고 하면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우리가 가정 생활을 함에 있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구이고 보모님의 고향은 어디이며 형제자매들은 또 언제 태어났는가 하는 내력을 알아야 가정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듯이, 한 나라의 국민들도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국가공동체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다. 한 나라의 역사는 현재 그 나라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도 있을 것이고 또 그 영토 안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영토가 아니지만 만주 벌판에서 벌어졌던 독립운동을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기 때문이고 비록 우리 조상은 아니지만 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그들의 활동이 바로 우리의 영토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나 중국사와 같은 국사는 그 범위가 매우 넓어지게 된다. 한국사 안에는 이씨조선사, 왕씨고려사, 신라사, 한민족사 등이 있을 것이고 중국사 안에는 청사, 명사, 한족사, 만주족사 등이 있을 것이다.
민족사는 한 민족이 생겨나서 성장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멸하는 과정까지의 역사를 말한다. 따라서 국사와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민족과 국가가 일치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에 혼동이 있다. 하나의 국사에는 여러 개의 민족사가 포함될 수 있고 하나의 민족사는 여러 개의 국사에 동시에 걸쳐져 있을 수 있다. 앞의 예로는 중국사 속에 한족사, 만주족사, 몽골족사 등이 포함되는 것을 들 수 있고 뒤의 예로는 몽골족사가 몽골국사와 중국사에 모두 걸쳐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한민족은 신라의 한국통일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므로 민족사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한다면 그 이전의 신라, 백제, 임나 그리고 삼한은 한민족사가 아니다. 한민족의 형성에 기여한 뿌리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통일 이전의 신라, 백제, 임나 그리고 삼한도 조선, 낙랑 그리고 고려와 함께 한국사에는 포함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이 바로 우리의 영토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영토나 민족이 아닌 역사공동체 단위로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더 깔끔할 때가 있다.
요동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요하 이동의 역사는 분명 한국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국사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의 원인

근래 한국사에 관해 갖가지 황당한 주장들이 나오고 또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나올 수 있다.

(1) 열등감

한국사를 보면 대륙과 열도로부터 침략을 받고 지배를 당한 일로 가득하다. 여기에 울분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영광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면 그 근거가 미약하더라도 믿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수난의 역사에서 생긴 열등감이 역사왜곡의 토양이 된 것이다.

(2) 정치적 이용

역사는 항상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민족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갓 민족국가를 세운 나라에서는 민족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지배에 명분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더욱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국민들을 마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상업적 이용

대중들이 열등감을 씻어줄 역사를 원한다면 방송이나 출판은 그러한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이 크게 일어나자 고려와 발해의 역사를 미화한 ‘주몽’, ‘대조영’ 그리고 ‘연개소문’같은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반면, 조선과 고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와 중국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요동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은 아예 출판 자체가 거부당하기도 했다.


참고한 자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1

신라민족론 전체글: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727






Aaron Nace

"New opinions are always suspected, and usually opposed, without any other reason but because they are not already common." - John Locke

"새로운 의견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언제나 의심받고 반대에 부딪힌다." - 존 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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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읽기:비회원, 덧글:일반회원, 쓰기:이태엽, 파일올리기:이태엽, 관리:이태엽


Recent Comments
 볼프 09-16 00:40 
재밌게 보고 갑니다. 센스가 좋으시네요.
 
 이태엽 08-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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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엽 12-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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